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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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보다 실천을
초등학교 시절에는 매주 학급회의를 해서 주훈을 정하고 '착한 어린이', '나쁜 어린이'를 뽑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쁜 어린이'를 뽑는 발상이 참 희한했다는 생각도 드는데, 그때 단골로 '나쁜 어린이'가 되다가 전학 가버린 아이가 있었다. 몇 년 뒤에 중학교에서 만났는데, 그는 괄목상대하게 '착한 어린이'로 변해 있었다. 그 학교에 계속 있었으면 난 정말 문제아가 되었을 거야, 라는 말을 그 아이한테서 들은 기억이 난다. 지금 나는 다양한 등산로가 있는 산이 좋고, 또 그런 산이 큰 산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초등학교 4학년 아니면 5학년 때였다. 학급회의에서 주훈을 정할 때였다. 교실이나 복도가 더러웠는지 누군가 청소를 깨끗이 하자, 하고 제안했다. 그랬더니 다른 아이가 청소를 깨끗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더럽히지 않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훈을 휴지를 버리지 말자, 로 하는 걸 제안합니다, 라고 말했다. 매주 문장 하나를 고르는 게 그리 쉽고 편한 일이 아니어서 아이들은 그래, 이번엔 이걸로 하자, 라며 눈빛을 서로 주고 받을 때였다. 반에서 심심찮게 '나쁜 어린이'가 되던 아이가 손을 들었다. "아무리 청소를 깨끗이 하고, 아무리 휴지를 버리지 않으면 무엇 합니까? 실천을 해야지요..." 아이는 이런 저런 말을 늘어놓더니 '말보다 실천을'을 제안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흘러 나왔다. 평소에 학급회의에서 좀처럼 발언을 안 하던 아이가 제안을 한 것도 신기하지만 그 '제안'이 그럴 듯하게 보였다. '말보다 실천을'. 그렇다. 백 마디 말을 하면 무엇 하랴, 행하지 않으면 다 그만인 것을. 게다가 긴 문장보다 간단한 표어 같은 문구도 근사해 보였다. 그날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다음 주 주훈은 '말보다 실천을'로 정해졌다.
그 다음 주 학급 회의였다. 이번 주를 주훈에 따라 잘 생활했는지 몇 마디 반성을 하고는 다음 주 주훈을 정할 차례였다.
"요새 너무 반 분위기가 시끄러운 것 같습니다. 다음 주 주훈은 실내에서 조용히 하자, 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이 쉬는 시간에 떠들기 때문에 조용하지 못한 것입니다. 실내에서 떠들지 말자, 로 주훈을 정했으면 합니다."
그때 지난주에 우레와 같은 지지를 받았던 아이가 다시 일어섰다.
"조용히 하자, 떠들지 말자, 말로만 하면 무엇 하겠습니까?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말보다 실천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반은 그 다음 주에도 '말보다 실천을'로 주훈을 정하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조금씩 고개를 갸우뚱거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하자고 누군가 제안하면, 그 다음 사람은 먼저 그 원인을 제거하자, 는 식으로 제안을 할 것이고, 그러면 그 우레와 같은 지지를 받고 있던 아이가 말만 하면 뭐 합니까, 실천이 중요하지요, 이 한마디만 더하면 되는 거였다. 빠져 나올 방법이 없었다. '도덕' 교과서도 긴 말 대신 딱 '말보다 실천을' 이것만 필요할 것 같았다.
내 기억으론 한 번쯤 더 주훈을 '말보다 실천을'로 정했던 것 같다. 담임선생님이 지도를 했는지, 아이 중에 누가 다른 논리를 제공했는지, 그도 아니면 모두 그 떨떠름한 기분을 떨쳐내려고 했는지, 이유는 기억이 안 나지만 우린 그 또래에 걸맞는 주훈으로 곧 복귀할 수 있었다.
4년이나 5년 임기일 사람들이 40년, 50년까지 미래를 끄집어낼 때, 누군가 옆에서 "그런 공약만 내세우면 뭐 합니까, 말보다 실천이 중요하지요. 그래서 우리 당은 '말보다 실천을'로 모든 공약을 대신 했습니다." 하면 한 번쯤은 성공하지 않을까?
(2012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