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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2) 3월에 소장이 바뀐 이후로 L부장은 정신이 없었다. 10년 넘게 아무 걱정 없이 계속되던 A부의 연구사업이 갑자기 종료되자, 다른 연구단들은 별로 자기들에게 보탬 되는 것도 없이 기초연구를 한다고 편하게 논문만 써대는 A부를 흔들고 싶었다. 특히 자신은 일 년에 백 편도 넘는 논문을..
- 2008년 늦가을에 쓴 글입니다. - 문득 읽어봤다. 내가 미쳤는지 모르지만, 아깝다, 이대로 묻혀버리기엔. 인간 문명의 유무형 자산뿐만 아니라 이런 평범한 인간들의 감정들도 인류 공용의, 공유의 자산 아닐까? (2023. 3. 31) L부장의 영혼 (1) L부장은 여느 때처럼 엘리베이터를 제쳐 두고 옆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오! 이박사. 파우스트 읽고 있어?” 두 달 전의 전체회의가 끝난 후로 그는 친근한 인사를 이 말로 대신하곤 했다. 옆으로 물러선 이박사는 주춤거리며 쾌하게 답을 하지 못했지만, 그는 총애하는 부하 직원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5층으로 계속 걸어 올라갔다. 월요일 아침, 부장실로 가는 길에 만난 직원들은 한결같이 주춤, 멈칫거렸다. 그가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무려 1시간이나 ..
별로 생각이 없었는데 벽제까지 따라 오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이편이 아닌 저편에 있습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이편이지만). 근데 참, 이상합니다.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합니다, 여기는 화장장인데……. 개신교와 천주교의 찬송이 들립니다. 가까운 이를..
다시 대한민국으로 돌아왔습니다. 벌써 입관이 끝난 모양입니다. 어제 새벽까지 저와 함께 했던 육신도(적어도 얼굴은) 좀 깨끗해졌습니다. 장기기증도 마치고 온 모양입니다. 영안실에는 이 사람 저 사람이 보입니다. 향냄새가 생각보다 좋습니다. 어? 저 친구는 눈이 젖어 있네요. 주변..
가는 길에 히말라야를 잠시 보고 가려고 들렸습니다. 아! 굉장하네요. ……저게 재두루미 떼인가요? 히말라야를 날아서 넘으려나봅니다. 어린 녀석들도 꽤 있네요. 이런 비행을 해마다 반복하면서 커가겠지요. 그런데 반대편에는 독수리 몇 마리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근데 가만있자……..
조금씩 ‘영혼으로 살기’에 적응하나 봅니다. 퀸스타운의 풍경을 떠올리자 지금 제가 있는 동네가 점점 작아집니다. 날아오른 것도 아닌데, 마치 공중에서 보듯이 동네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구글 어스’로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시가 보이고 바다가 나타나고, 드디어 한반도가 눈..
2008년 이른 봄에 쓴 글입니다. 봄꽃이 늘 그렇듯 저는 살아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새벽까지 살아 있던 제가 어쩌다가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 아직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죠, 지금 죽은 상태 같습니다. 근데…… 죽은 자가 어떻게 말을 하냐고요? 글쎄요……. ..
나는 구사일생으로 맥성에서 살아남았다. 시체 밑에 죽은 듯 널브러져 찬 서리 내리는 10월의 긴 밤을 보내고, 다시 한나절을 있다가 주력 부대가 물러간 다음에 도망쳐 나왔다. 나는 서천으로 가는 산길에 숨어 적군이 물러가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숨을 돌리고서야 스승께서 주셨던 하..
해시가 가까워 왔다. 모두 준비를 마치고는 관공 주위로 모여 들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모든 장수들은 내 말을 가슴 깊이 간직하여 한 치의 어긋남도 없도록 하라.” “예!” 장수들의 비장함을 못 이긴 듯 촛불조차 바람에 일렁임을 멈추고 있었다. “형주는 사방으로 트여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