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책

*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이재근) - 4

조용한 3류 2023. 12. 4. 21:02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⑱] 피터 와그너 : 세계 오순절 운동과 신사도 운동의 대부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1092

 

- 20세기가 시작될 무렵에 한 줌에 지나지 않는 극소수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변방 운동으로 등장한 오순절 및 은사주의 계열 기독교(Pentecostal & Charismatic Christianity)는 20세기가 끝날 무렵, 세계에서 가장 성장이 빠르고 강한 영향력을 가진 주류 기독교 중 하나로 확고히 자리매김했다.

: 2010년 통계를 보면, 세계에서 오순절 및 은사주의 계열 기독교인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인구가 최소 6억 명에 이르며, 이는 세계 기독교 인구의 약 1/4을 차지한다. 이 통계에는 오순절 계열이 아닌 기존 전통 교단에 속해 있으면서도, 성령세례나 은사 등의 지속성과 유효성을 인정하는 은사주의 기독교인 수도 포함되어 있다.

- 그러나 이 시기부터 와그너는 교회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인을 영적인 것, 특히 성령의 초자연적인 기적과 역사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70년대 중반부터 풀러에서 동역했던 빈야드 은사주의 운동 지도자 존 윔버(1934~1997)와 함께 1984년 이후 풀러에서 △이적과 기사 △영적 전쟁 같은 과목을 가르친 것이었다.

- 성령세례를 중생과 분리된 제2의 축복이라고 주장하는 1세대 오순절 운동 교리를 수정하고, 은사와 이적, 기사, 신유의 보편성과 일상성을 강조한 와그너와 윔버의 운동은 더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로 퍼져 나갔다.4)

- 그러나 1998년 이후에 그가 쓴 책은 대부분 사도직, 신사도 교회 등, '사도'와 관련된 한 가지 주제를 반복해서 다룬다. 1998년에 출간한 <신사도 교회들을 배우라 The New Apostolic Churches>7)가 시작이었다. 처음에 온건하게 사도 시대에 보편적이었던 은사를 실천하는 교회들의 사례를 수집해서 소개하던 그는 2000년 이후 '사도' 직분의 부활이라는 주제를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역사상 대부분의 주류 교회들이 사도 시대 이후 사도와 선지자의 직분이 종결되었다고 본 것에 반대하고, 오늘날에도 다시 1세기처럼 기름 부음을 받은 선지자와 사도가 세워질 수 있고, 실제로 세워졌다고 주장한 것이다. 대표적인 구절을 인용해 보자.

- 특히 이 책(오늘날의 사도 Apostles Today, 2006)에는 부록으로 1999년에 창립되어 2006년 당시 500명이 넘은 사도가 가입되어 있다는 국제사도협회(The International Coalition of Apostles) 의장사도 피터 와그너가 2006년에 작성한 '사도란?'이라는 제목의 예비 문서가 실려 있다. 여기서 와그너는 하나님이 세우는 사도의 자격으로 △특출한 인격 △겸손 △지도력 △권위 △고결함 △지혜 △기도를 든다. 모든 사도가 행하는 사역에는 △계시받음 △비전 제시 △태동시킴 △풀어 주기 △세워 나감 △질서 부여 △가르침 △파송 △완성 △전투 △세대를 연결 △준비시킴이 있다. 일부 사도들이 행하는 것에는 △예수님을 봄 △표적과 이사를 행함 △이설을 드러냄 △교회 개척 △교회 훈육 △교류 문화적 사역 △적에게 빼앗긴 지역을 하나님나라로 돌이키는 일이 포함된다.9)

- 피터 와그너는 86세이던 2016년 10월 21일에 지병 심장병으로 별세했다. 미국 복음주의 잡지 <크리스채너티투데이 Christianity Today> 편집자 중 하나로 휘턴칼리지 선교 및 전도학 교수이기도 한 에드 스테처(Ed Stetzer)는 와그너 사망 다음 날에 다음과 같이 와그너를 회고했다.

"당신이 피터 와그너를 알고 있었다면, 사람들이 자주 물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피터 와그너요?' 그가 두 얼굴의 사나이라서가 아니라, 견해를 아주 많이 바꾸었기 때문에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당신이 1980년대에 그를 만났다면, 아주 다른 (그러니까 예컨대, 은사주의자가 아닌) 피터 와그너, 즉 교회 성장 운동을 이끈 와그너를 만났을 것이다. 새 밀레니엄이 된 후에는 그는 신사도 개혁이라 불리는 운동으로 유명해졌다."10)


- 미국 및 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피터 와그너는 그를 절대적으로 따르는 사람들, 특히 그를 21세기에 새로 부활한 사도 중 최고 사도로 인식한 이들에게는 절대적인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 반대로, 전통 주류 교회, 특히 개혁파 장로교회는 성령세례를 중생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방언·신유·축사·통변·예언 등의 성령의 은사가 사도 시대에 종결되었다고 가르치며 모든 종류의 오순절 및 은사주의 운동을 경계해 왔다. 따라서 성령세례와 은사의 지속성 논란을 넘어, 21세기에 사도가 새로이 기름 부음 받아 부활했다고까지 과감하게 주장한 와그너가 이단 시비에서 자유로울 리 없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2007년)과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2009년)은 '참여 금지',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2015년)은 '엄히 경계', 심지어 한국기독교장로회(2014년)마저도 '교류 금지'를 결의할 만큼, 와그너와 신사도 개혁 운동은 한국 주류 개신교회에서도 경계 대상으로 지목되어 있다.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 ⑲ ] 카를 바르트 : 20세기 개신교회 '교부'로 불리며 가장 영향력 있는 '삶을 경주(Lebenslauf)'한 현대 신학자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2628

 

- 에버하르트 부쉬는 바르트의 자전적인 기록들과 회고록을 토대로 바젤에 대한 바르트의 유대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바젤 사람이 오른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아 주는 것은 '이른바 태생적인, 살짝 인본주의적인 의심'이다. '끊임없는 관찰로 습득한 삶의 지혜'는 바젤 사람이 왼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지켜 준다. 그는 이러한 극단의 중간 어딘가에 머물려고 하고, 조금 자유로운 사상을 조용히 따르거나, 조금 경건한 열광주의도 조용히 따르기는 하지만, 겉으로는 자유와 절제를 건강하게 아우른 이미지를 항상 유지한다.

 

 

- 아버지의 마지막 말은 다음과 같았다. "주 예수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학문도 아니고, 교육도 아니고, 비판도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만 한다." 사실상 이때까지도 그는 아버지의 신학 유산에 거의 공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언과 그의 목회 현장, 그리고 독일에서 1차 대전과 연관돼 일어난 사건이 서로 연계되어, 그가 다른 방향으로 '회심'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 바르트의 완전한 방향 전환에 방점을 찍은 사건은 그가 거의 성인군자처럼 추앙하던 현대 신학 스승들이 모국 독일의 '악한' 전쟁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한 일이었다. 1914년 8월 1일 전쟁 발발 당일, 독일 지성인 93명이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수상 베트만-홀베크의 전쟁 결정에 찬성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런데 이 93명 명단에, 마르틴 라데를 제외하고는 그가 존경한 독일인 스승의 이름이 모두 들어 있었다. 바르트는 그때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나는) 독일에 있는 나의 모든 스승들, 그 위대한 신학자들의 가르침에 의심을 품게 되었다. (중략) ' 그들의 '윤리적 실패'는 '그들의 성서주석학과 교의학의 전제도 올바른 상태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했다. 그래서 '내가 그때까지 철저하게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겼던 세계, 곧 성서 주석, 윤리, 교의학, 설교의 세계 전체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으며, 당시 독일의 다른 신학자들이 주장하던 내용의 진실성도 덩달아 흔들리게 되었다.'"

이는 성명서를 발표한 당대 독일 신학자들에 대한 실망과 비판이었지만, 결국 이 신뢰 상실은 자유주의신학의 창시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그 성명서를 통해, 그리고 그 이후에 (심지어 그리스도교 세계에도) 나타난 모든 것을 통해 정체가 드러난 그 신학의 기초를 세우고, 그 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그(슐라이어마허)다!"15)

 

독일 스승들의 신학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게 된 바르트는 이제 설교, 교육, 심방을 위해 전적으로 다른 기초를 찾아내야만 했다. 자펜빌 부임 이후 둘도 없는 친구가 된 동향 친구이자 이웃 마을 로이트빌 목사이기도 했던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과의 오래되고 진솔한 대화를 통해, 바르트는 성경 자체가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 초판 발행 이후 11개월만인 1921년 9월 집필이 완료된 제2판은 "피상적이고 과장되고 애매모호한" 것 같았던 초판과는 달리, 더욱 선명하고 본질적으로 '절대타자'인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함으로써,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인 구원의 계시를 선포하는 신학을 제시했다.17)

- 그러나 1차 대전에서와 마찬가지로, 1930년대 다시 한번 독일 학계와 주류 교계가 독일 민족주의와 독일 문명을 기독교적 이상과 동일시하는 상황을 목격했다. 저명한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1933년 5월 하이델베르크대학 총장 취임 연설에서, 1933년 1월 독일 수상이 된 아돌프 히틀러를 열렬히 옹호했다. 파울 알트하우스, 에마뉴엘 히르쉬, 게르하르트 키텔 같은 저명한 신학자들도 이미 오래 전부터 히틀러와 그의 국가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었다.

- 바르멘 선언이 실제로 나치 정권에 대한 독일 교회의 저항을 이끌어 정권의 종교 정책에 어떤 변화를 이끌어 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르트 자신은 자기가 작성한 이 선언의 정신을 가능한 영역에서 실천했다. 예컨대, 그는 1934년 11월 본대학에서 총통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수업 시작 전에 히틀러식 경례를 하라는 정부 요구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12월 해직 명령을 받고, 독일 내 모든 종류의 강연 금지 명령을 받은 그는 이듬해 5월 스위스로 돌아갔다. 다행히 7월부터 바젤대학 교수로 초청받으면서, 남은 33년 생애를 고향에서 마무리할 수 있었다.20)

- 거대한 산과 같은 학자였던 만큼, 그에게는 추종자도 많았고 비판자도 많았다. 이미 언급한 대로, 자유주의 진영은 그가 근대 이전의 무지한 초자연주의로 돌아갔다고 비난했다. 보수주의, 특히 미국 근본주의 진영에서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을 날카롭게 구별해 성경의 무오성을 거부했다고 비난했다. 1960년대에는 그가 젊은 시절 빠져든 것보다 더 급진적인 신학들이 부상하면서 그를 좌절시키기도 했다.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⑳] 조용기 : 역사상 최대 교회를 일군 한국 오순절 운동의 대표자 (이재근, 2021.06.01 17:54)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2842

 

-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명성에서나, 영향력에서나, 파급력에서나, 논란에서나, 20세기에 조용기를 앞선 한국 기독교인은 없었다.

- 사회학적 요소는 순복음교회가 설립되고 고속 성장한 1950년대 말~1990년대가, 한국 사회의 개발독재 산업화 및 급속한 경제성장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분단과 산업화 과정에서 이촌향도 현상이 일어났고, 전통적인 시골 공동체를 떠나 도시에 정착한 빈민들에게는 대화와 우정, 사랑을 나눌 새로운 소속 공동체가 필요했다. 도시에 세워진 종교 시설들은 종파에 상관없이 공간을 상실한 이들이 머물 새로운 터전이 돼 줬다. 사람들은 그중에서도 양심에 거리끼지 않는 방식으로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성공·풍요·번영·형통이라는 물질적 복을 약속·정당화하는 종교에 더 급속히 몰려들었다. 도시의 한국 개신교회 전반이 이런 사회적 필요를 채우는 공간이 됐지만, 그중에서도 조용기의 순복음교회가 가장 적응력이 뛰어난 교회였다고 평가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다.15)

- 3박자 축복요한3서 1장 2절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구절에서 비롯했다. 조용기 이전에도, 또 한국 바깥 오순절 번영신학 설교자들도 이 구절을 '영혼 구원', '범사 형통(물질 축복)', '육체 강건'의 삼중 구원·축복을 강조하는 구절로 생각했다. 예컨대, 한국에서 오순절 운동에 속한 하나님의성회 교단이 주로 '순복음교회'로 알려진 이유는 조용기를 신학교로 이끈 루이스 리처즈 선교사 때문이었다. 이는 서양의 오순절 교회들이 영혼 구원만 강조하는 대다수 개신교회와는 달리, 물질 구원과 육체 구원을 강조함으로써, 복음을 전인적이고(whole) 충만하고(full) 순전하게(pure) 회복시켰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순복음(Full Gospel)'이라는 단어가 이 교단의 대표적인 이름이 됐다.17) 

- 조용기는 전 세계 오순절주의자가 강조하는 '성령 안에서의 자유'를 똑같이 강조한다. 역동성·자발성·열정·영성은 모든 오순절주의자의 특징이고, 질병·가난·실업·고독·악령·주술을 조용기와 한국 순복음교회 신자들이 다루는 태도 역시 타국 오순절 신자들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 한국적이고도 창조적인 혁신이자 선택적인 변혁으로는 '산 기도'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한국인의 오랜 전통적 영성의 반영일 수 있다. 그러나 앤더슨은 이를 기독교의 샤머니즘화로 볼 것이 아니라, 한국 샤머니즘과 상호작용하는 오순절 운동 특유의 능력으로 파악한다. 오순절 신자들만큼 강하게 샤머니즘 및 샤먼(무당)을 대적·거부하는 기독교 전통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조용기도 마찬가지였다.19)

- 한편 앤더슨은 빈곤과 억압에 반응해 형통과 번영을 강조하는 신학이나, 중생과 구별된 성령세례, 방언, 신유, 축사 등의 가르침 모두가 고전적 오순절주의와 거의 차이가 없다고 말한다. 예수를 4중 복음의 주창자, 즉 구원자, 치유자, 성령세례자, 다시 오실 왕으로 이해하는 교단인 복음교회(Four Square Church)의 이해에 조용기가 3박자 축복을 가미해 확장한 신학이 5중 복음(구원 혹은 갱신, 성령 충만, 신유, 다른 이들과 나눠 쓰기에 충분한 풍성한 축복, 그리스도의 재림)이다.20)

- 적극적 사고방식과 희망의 설교도 조용기가 만든 것은 아니다. 이는 미국 수정교회 목사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1926~2015)에게 배운 것이다. 4차원 영성론의 핵심 요소인 △믿음 △기도 △꿈 △말 역시 '기록된 말씀(성경)'이 '선포된 말씀'이 되는 과정을 강조한다. 이런 수단을 통해 죽은 글자가 살아나 기적이 된다는 것이다. 오순절 신자들은 이 요소들이 사도행전에서 기원했으며, 오늘날 신자들에게도 역사하는 원리라고 믿는다. 기도와 생각과 상상을 동원한다는 아이디어는 로버트 슐러와 함께 '적극적(긍정적) 사고방식' 개념의 전파자라고 할 수 있는 노먼 빈센트 필(Norman Vincent Peale, 1898~1993)에게서도 차용했다.21)

- 개발독재 시절, 인권을 억압하는 정권에 예언자적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는커녕, "'민족의 중흥'과 보조를 맞춘 '민족의 복음화'를 외치고, '기독교인의 총화 안보와 반공 궐기'를 이끌고, '해방신학·혁명신학·흑인신학'을 '악마적 공산주의의 앞잡이'로 보았고, 유신 독재를 지지하며 반공 담론 대중화에 일익을 담당했다"는 비난도 있다.23) 물론 이 비난은 소수의 진보 교회들을 제외한 한국교회 전반에 적용된 비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