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대혜(大慧)스님 서장(書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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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거사가 말했습니다. "다만 있는 것을 모두 비워버리기를 바랄 뿐, 없는 것을 결코 진실하게 여기지 말라" 이 두 구절만 알 수 있다면 일생의 공부는 끝납니다.
(증시랑(曾侍郞) 천유(天遊)에 대한 답서3 중에서)
어떤 스님이 조주(趙州) 스님에게 묻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 스님이 말하기를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 한 글자는 수많은 잘못된 지식과 잘못된 깨달음을 무찌르고 막아주는 무기입니다. 이 무(無) 한 글자를 유(有)니 무(無)니 하고 이해해서도 안되고, 도리(道理)를 지어 이해해서도 안되고, 생각으로 사량하고 헤아려서도 안되고, 눈썹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박이는 곳에 의지해서도 안되고, 언어로써 살아날 궁리를 해서도 안되고, 일 없는 속으로 도망쳐서도 안되고, 붙잡아 일으키는 곳에서 수긍해서도 안되고, 문자를 들어서 증거 삼아서도 안됩니다. 다만 하루 종일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속에서 늘 붙잡아 들고 계시고 늘 알아차리고 계셔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를 일상의 삶에서 떼어놓지 마십시오. 만약 이와 같이 공부해 간다면 언젠가는 문득 스스로 볼 수 있을 것이니, 그때에는 어떤 일에도 방해받지 않을 것입니다.
(부추밀(富樞密) 계신(季申)에 대한 답서1 중에서)
이 마음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와 일체로서 둘이 아닙니다. 만약 둘이라면 법(法)은 평등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받고 마음을 전한 것이 모두 허망하며 진실을 찾는 것이 도리어 어긋난 일입니다. 다만 하나로서 둘 아닌 마음이 결코 날카로움을 취하고 둔함을 버리는 속에 있지 않음을 알기만 한다면, 곧 달을 보고 손가락은 잊어서 바로 한 칼에 끝장을 낼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다시 머뭇거리며 의심하여 앞을 생각하고 뒤를 계산한다면, 허망한 손가락 위에서 진실이라는 알음알이를 낼 것이며, 주관(六根)이니 객관(六境)이니 하는 속에서 헛된 도깨비를 조작해낼 것이고, 오온(五蘊)과 십팔계(十八界) 속에 망녕되이 사로잡혀서 끝마칠 날이 없을 것입니다.
(진소경(陳少卿) 계임(季任)에 대한 답서1 중에서)
..."이른바 수행에서는 단상(斷常)의 두 변견(邊見)에 떨어짐을 두려워하니, 단견(斷見)은 자기 마음의 본래 묘하고 밝은 본성을 끊어 없애버리고 오로지 마음 밖에서 공(空)에 집착하여 선적(禪寂)에 막히는 것이요, 상견(常見)은 일체법이 공(空)임을 깨닫지 못하고 세간의 온갖 유위법(有爲法)에 집착하여 그것을 궁극으로 삼는 것이다.”
(진소경(陳少卿) 계임(季任)에 대한 답서1 중에서)
옛날 위부(魏府)의 노화엄(老華嚴)이 말했습니다.
“불법(佛法)은 매일 매일 쓰는 곳과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곳과 차 마시고 밥 먹는 곳과 이야기하고 묻는 곳과 행위하는 곳에 있으니, 마음을 들어 생각을 움직이면 도리어 옳지 않다.”
피할 수 없는 곳을 딱 마주치면, 절대로 마음을 일으켜 생각을 움직여서 점검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진소경(陳少卿) 계임(季任)에 대한 답서2 중에서)
일반적으로 총명한 사람은 화두를 들으면 곧 심의식으로 이해하여 추측하고 헤아려 증거를 끌어들이며 가르쳐 준 곳이 있음을 말하려 하지만, 화두란 증거를 끌어들이는 것도 용납하지 않고 추측하고 헤아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고 심의식으로 이해하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는 짓입니다. 비록 증거를 인용할 수 있고 추측하고 헤아릴 수 있고 심의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들은 모두 죽음을 앞둔 정식(情識)의 일들로서 생사의 기슭에서는 전혀 힘을 얻지 못합니다.
만약 죽음이 찾아왔을 때 힘을 얻지 못한다면, 비록 분명하고 밝게 말할 수가 있더라도 이해함과 더불어 아래로 떨어져 버리며, 차별 없이 증거를 끌어댈 수 있더라도 모두가 귀신집안의 살림살이이니, 이들은 한 조각 나 자신의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오직 법(法)을 아는 사람만이 선문(禪門)의 여러 가지 차별되고 다양한 견해들을 두려워합니다. 대법(大法)에 밝지 못한 사람은 흔히 병을 약으로 착각함을 알아야만 합니다.
(왕교수(王敎授) 대수(大授)에 대한 답서 중에서)
제가 아직 잠이 들기 전에는 부처님이 칭찬하신 것에 의지하여 행하고 부처님이 비난하신 것을 감히 범하지 않으며, 이전에 스님들에게 의지하고 또 스스로 공부하여 조금 얻은 것을 또렷하게 깨어 있을 때에는 전부 받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침상에서 잠이 들락말락할 때에 벌써 주재(主宰)하지 못하고, 꿈에 황금이나 보물을 보면 꿈 속에서 기쁘함이 한이 없고, 꿈에 사람이 칼이나 몽둥이로 해치려 하거나 여러 가지 나쁜 경계를 만나면 꿈 속에서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모릅니다. 스스로 생각해보면 이 몸은 오히려 멀쩡하게 있는데도 단지 잠 속에서 벌써 주재할 수가 없으니, 하물며 죽음에 임하여 육체를 구성하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이 흩어지며 여러 고통이 걷잡을 수 없이 다가올 때에 어떻게 경계에 휘둘리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여기에 이르러면 마음이 허둥지둥 바빠집니다.”
원오 선사께서는 이 말을 듣고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는 허다한 망상이 끊어질 때에, 너는 스스로 깨어 있을 때와 잘 때가 늘 하나인 곳에 도달할 것이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에는 믿지 않고 매양 말하였습니다.
“내 스스로를 돌아보면, 깨어 있음[寤]과 잠들어 있음[寐]이 분명히 둘인데, 어떻게 감히 입을 크게 벌려 선(禪)을 말하겠는가? 다만 부처님께서 설하신 깨어남과 잠이 늘 하나라는 말이 망녕된 말이라면 나의 이 병을 없앨 필요가 없겠지만, 부처님께서는 진실로 사람을 속이지 않으시므로 이것은 곧 내 스스로가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이다.”
(향시랑(向侍郞) 백공(伯恭)에 대한 답서 중에서)
천 가지 의심과 만 가지 의심이 다만 하나의 의심이니 화두 위에서 의심이 부서지면 천 가지 의심과 만 가지 의심이 일시에 부서질 것입니다. 화두가 아직 타파되지 않았다면 우선 바로 그 화두 위에서 화두와 서로 맞붙어 버티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 화두를 버리고 도리어 다른 문자 위로 나아가 의심을 일으키거나 경전의 가르침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옛 사람의 공안(公案) 위에서 의심을 일으키거나 일상의 잡다한 일 가운데에서 의심을 일으킨다면, 모두가 삿된 마구니의 권속입니다. 또 들어 일으키는 곳에서 받아들여서도 안되며, 사량(思量)으로 헤아려 보아도 안되고, 다만 사량할 수 없는 곳에다 뜻을 두고 사량하면 마음은 갈 곳이 없어져서 늙은 쥐가 소 뿔 속에 들어가 곧 갈길이 막혀버리게 될 것입니다.”
(여랑중(呂郞中) 융례(隆禮)에 대한 답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