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제가 지금 여기 있나이다.[1] 본문
나는 연초에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현재는 섬길 교회를 정하려는 중인 50대 중년이다.
혹시나 비슷한 처지의 분들에게 보탬이 될까 해서
그 동안 내 마음이, 내 생각이 흘러갔던 자취를 적어볼까 한다.
[1] 편은 기독교로 회심하는 대목까지이다.
나는 절에 다니지는 않았지만
불가의 가르침을 삶의 최고 가치로 삼았었다.
마누라가 종교 탄압(?)을 하면
방에 들어가 신묘장구대다라니를 108독하거나
관세음보살을 만 번 부를 정도는 되었다.
개종이 있던 그날 오전까지, 별 다른 징후는 없었다.
(혹시 관심 있는 분은 글 '개종' 참조하시길.)
지난 11월, 마누라의 기독교 권유를 '충분히' 들어주기 위해
나는 성경을 일독했다.
감명을 받은 부분도 있었지만, 신앙을 흔들지는 못했다.
연말에는 대혜스님의 서장을 읽으며 고향에 돌아온 기쁨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리고 중 1때부터 궁극적 가치를 찾아 방황을 해온 내가 (농담 삼아 '야매 40년'이라 함.^^)
가정의 평화나 세속적인 이유를 위해 개종할 리는 절대 없었다.
그날 새벽에 잠이 깨어 명상에 잠깐 들었었다.
그때 문득 한 장면이 지나가기는 했지만,
계속 내 마음을 붙들지는 않기에 흘려보냈었다.
오전이 되자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뭐 답답한 게 한 두 번인가? 뭐 새벽에 잠 못 이룬 게 별일인가?
현실은 여전히 답답하지만
뭐 기다린 게 일이 년인가...
그런데 점점 답답해졌다.
그냥 미칠 것 같았다.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 터질 것 같은 게 무엇 때문인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생뚱맞게 한 구절이 떠올랐다.
'스스로 있는 이'.
그러자 곧바로 불가의 연기(緣起)가 떠올랐고
잠시 후 내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지금 이 한 줄을 쓰면서 내 눈시울은 다시 뜨거워진다.)
그러자 답답함이 사라졌다.
요즘 '참 나'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이 세상에서 '나'란 존재가 가장 소중할 텐데,
불가에서는 '나'가 없다.
무아
(無我)
다.
있다고 하는 건 다 꿈이고, 환상이고, 물거품이고, 그림자이다.
전생, 이생, 내생을 윤회하는 주체도
아뢰야식이라는 좀 더 깊이 있는 허깨비일 뿐이다.
근데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불가에서는 모든 게 인연생기(
因緣生起)
이다.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이게 일어나서 저게 일어나는 거다.
서로 관계 없는, 독존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애써 '나'라고 할 만 한 건 없고, 단지 집착일 뿐이다.
즉 '참 나'를 찾으려고 애써 보니
그 '나'는 없더라, 였다.
따라서 불교에는 유일신교에서 말하는 신은 없다.
신중기도하는 신들은 육도의 하나인 천상에 있는 이들이고
그들도 윤회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런데... 그런데 '스스로 있는 이'?
(하나님께서 모세와 대면시 하신 말씀으로 기억한다.)
스스로 있다면 연기법과 무관하다는 얘기?
'무아'가 텅 비워놓은 속을
'연기'와 무관한 이가 거침없이 채우셨다.
피조물이 창조주께 순종하고...
'자유의지'를 갖는 이 소중한 '나'들한테 힘든 말이다.
하지만, 원래 무아인데, 원래 '내'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하신들 뭐가 어떠리. (말이 그렇다.^^)
그날 이후, 나는 불교를 돌아본 적이 없다.
그냥 생각이 안 났다.
아무리 갈등이 생겨도
그래서 마누라가 '혹시'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아도
나는 딱 한 마디 했을 뿐이다.
"불교가 미아보호소냐?"
뭐, 은혜를 모르는 이 따위 놈이 다 있을까,
불보살님들이 나를 버린신 게 틀림없어,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