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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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깎은 이야기
우리 때는 대부분의 중학생들이 빡빡머리였다. 머리 길이를 '2부', '1부'라고 불렀는데, 대부분 2부로 깎았고, 1부는 손으로 만지면 따가울 정도로 짧았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꿈에도 그리던 '스포츠 형' 머리가 허락되었다. 중학생 때는 '스포츠'가 반항이라면 고등학생 때는 '2부'가 반항이었다.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앞머리를 더 기르려고 기를 쓰다가 가끔 정문에서 선도부에게 붙잡히기도 했다. 그런 단속의 절정은 교련 검열 때 있었다.
그땐 교련 수업이란 게 있었고, 1년에 한 번씩 각종 제식훈련을 검열 받았다. 그때가 되면 두발 검사가 일시에, 전폭적으로 행해졌는데, 그래도 마음 좋은 선생님은 '바리캉'이라는 기계로 뒷머리를 조금 깎아 올렸지만 심술궂은 선생님은 바로 앞머리에 고속도로를 내기도 했다. 그러면 남들처럼 자라기 위해선 몇 달이 걸렸다. 그래도 그때는 뒷머리에 도로를 낸 채 버스에 타고 내려도, 길을 걸어도, 지나가는 사람들도 그냥 킥킥거릴 정도의 일이었다. 우리나라가 좋아진 건 분명 사실이다.
고3이 되면 마음잡았다는 표시로 머리를 빡빡 미는 경우가 있었는데, 역시 이 경우에도 '반항'의 끼가 다분했다. 학교 신문을 만드는 등 공부 외의 활동으로 성적을 많이 깎아 먹은 나는 고3이 되자 마음이 무척 바빴다. 그 바쁜 마음만큼 성적이 오르지 않던 어느 봄날, 누워서 답답한 마음을 달래던 나는 벌떡 일어나 이발소로 가서 머리를 밀었다. 다행히도 주변에선 이런 나의 결기를 별로 비웃지 않았는데, 문제는 머리 깎은 일주일 후에 졸업앨범 사진을 찍었다는 거였다. 내년 2월에 받을 앨범용 사진을 4월에 미리 찍다니, 참 어이없고 기가 찼지만, 담당 선생님은 나의 까실까실한 머리를 쓱쓱 문지르며 "그러니까, 누가 머리를 밀라고 했냐?" 하였다. 덕분에 졸업 앨범에서 나를 찾기란 무척 쉽다.
대학에 들어가자 당연히 머리를 길렀다. 80년대는 모두 머리를 길게 기르던 시절이었는데, 귀의 반쪽이 보이게끔 머리를 자르고 나면 두 달쯤 후엔 머리가 다시 귀를 덮었다. 그때 이후로 나는 특별히 깔끔하게 보일 일이 없으면 두 달에 한 번 이발소에 간다. 아직도 나에게 이발소란, 남자들이 머리를 깎는 곳이다.
그러다 방위 복무를 위해 머리를 다시 밀었는데, 중학교 때보다도 더 자주 머리를 깎았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방위를 마친 후에는 머리가 무척 천천히 자랐다. 어쨌든 머리를 다시 빡빡 깎을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러다 나는 마흔이 넘어 다시 머리를 밀었다. 그해 5월에 딸아이를 먼저 보냈던 나는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더 미칠 것 같았다. 내가 머리를 밀어달라고 하자, 이발사는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다, 마누라한테 허락 받았냐고. 남보다 두 번 더 빡빡 밀어보는 거였지만, 내 머리를 깎는데 남의 허락 여부를 질문 받은 건 처음이었다. 이발소를 나오는데 6월의 더운 바람이 마치 보리밭을 흔드는 것처럼 내 머리를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나는 내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땐 딸아이의 49재 중이었는데, 스님이 내 머리 모양을 보더니 이런 미욱한 놈이 있느냐는 얼굴로 에이 참, 에이 참 하시는 거였다. 그래도 어떡하나, 어리석으니 애꿎은 머리라도 밀어야지... 49재를 마치고 마누라랑 첫 해외여행을 갔을 때, 같이 간 일행들이 처음에는 내가 항암 치료중인 환자나 파계한 스님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그 덕분에 모자를 몇 개 살 수 있었는데, 머리가 자라자 모자가 머리에 오똑 얹히기만 하는 바람에 괜한 허비를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앞으로 얼마를 더 살지 모르지만 흰머리가 나면 나는 대로, 빠지면 빠지는 대로 살다가, 간수하기 귀찮거나 모양이 보기 싫다고 하면, 다시 한 번 더 밀어볼 요량이다. 마누라는 질색을 하지만, 생각보다 괜찮다. 시원하고, 감기 편하고, 무엇보다 햇살이, 바람이 두피를 어루만지는 기분이 꽤 괜찮다. 그거, 빡빡 밀어보지 않으면 아무도 모른다.
(2012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