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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 민간인 제외한 의열단의 '칠가살'

조용한 3류 2015. 12. 3. 13:13

뭔 글을 이렇게 잘 쓰나...



민간인 제외한 의열단의 '칠가살'


시사INLive | 김형민 | 입력 2015.12.03. 08:44



1919년 11월9일 만주 지린성의 한 중국인 집에 젊은 조선인 13명이 모여들었어. 경상도 밀양 출신의 김원봉·윤세주·이성우 등을 주축으로 한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와 사생결단의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그 이름도 유명한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게 돼. 의열단은 애초부터 독립 투쟁의 수단으로 유혈과 폭력을 감행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어. 8개월 전 벌어진 평화적인 만세 시위(3·1운동)에 일본 경찰과 군대가 어떤 대접을 했는지 지켜본 이들의 불가피한 결론이었지. 일제의 주요 인물을 암살하거나 기관과 시설을 공격하고, 그를 통해 식민지 조선인의 용기를 일깨우겠다는 생각이었다고나 할까. '우리에게는 아직 군대와 감옥이 없으므로 저들에 저항하고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단총(短銃)·살검(殺劒)·폭탄이 있을 뿐이다.'


이걸 가치 개념을 발라낸 건조한 용어로 표현하면 ‘테러’가 되겠지. 테러란 '정치적 반대파를 진압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이거든. 의열단은 테러, 즉 의열 투쟁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설 것을 결의했고, 단재 신채호가 사나운 명문으로 창립정신을 표현한 게 유명한 ‘조선혁명선언’이야. '민중은 우리 혁명의 대본영(大本營)이다.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암살·파괴·폭동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 생활에 불합리한 일체 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의열단은 1920년 봄 폭탄을 국내에 반입해 조선총독부를 폭파하려 했지만 일제 경찰의 감시망에 걸려 실패하지. 하지만 그 충격은 컸어. 여차하면 총독부가 날아갈 판이었잖아. 일제 당국은 눈에 불을 켜고 의열단 관계자들을 닦달했어. 하지만 의열단의 기세는 결코 꺾이지 않았지. 당시 체포된 윤세주는 예언 같은 법정 진술을 해. '체포되지 않은 동지들이 도처에 있으니 반드시 강도 왜적을 섬멸하고 우리들의 최후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그리고 ‘체포되지 않은 동지들’은 움직이기 시작했어.




ⓒ국가보훈처 : 1919년 11월9일 만주 지린성의 한 중국인 집에서 조선인 13명이 의열단(위)을 결성했다.



그 최초 의거가 1920년 9월에 일어난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파 사건이야. 왜 부산경찰서냐 하면 앞서의 폭탄 반입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잡혀 들어가 고초를 치른 악명 높은 곳이었기 때문이지. 또 부산은 박재혁 의사의 고향이기도 했어. 독립운동단체 결성 혐의로 감옥살이를 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중국과 싱가포르를 누비며 무역상을 했던 박재혁 의사는 이렇게 말하며 거사에 나섰는지도 모르지. '부산경찰서는 마 내 손으로 박살내야 되겠십니더. 옛날부터 눈에 가시였다카이.'


박재혁은 폭탄을 숨긴 채 중국에서 일본 찍고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들어와.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가 고서(古書)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고 고서상(商)으로 위장해 면회를 신청하지. 하시모토가 호기심 그득한 눈으로 자신이 내민 낡은 책들을 들여다보는 것을 지켜보던 박재혁은 별안간 유창한 일본어로 언성을 높여.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놈들이 우리 동지들을 잡아 우리 계획을 깨트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는 것이다.' 기절초풍해서 눈이 접시만 해진 하시모토 앞에서 박재혁은 폭탄을 꺼내 터뜨리지. 쾅! 하시모토는 중상을 입었다가 세상을 떠나고 박재혁 또한 심한 부상을 입고 체포돼.


의거 성공 소식이 들려온 후 김원봉은 박재혁이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를 받아. '형편이 뜻대로 되어가니, 이 모든 것이 그대가 염려해준 덕분입니다.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즐겁습니다만, 그대의 얼굴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원봉은 이 편지를 받고 오랫동안 괴로워했다고 해. 왜 그랬을까. 일본인 서장 하시모토를 죽이기 전에 그 죄상을 그에게 들려주라고 얘기했던 게 김원봉이었기 때문이야. 슬쩍 폭탄만 던진 뒤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사람을 애꿎게 죽게 만든 게 아니었나 하는 자책감이었지.




ⓒAFP : 11월15일 IS의 테러로 89명이 숨진 파리 바타클랑 공연장 앞에 추모객들이 꽃을 가져다 놓았다.



일본인 양민은 제외한 의열단의 ‘칠가살’ 목록


아빠는 이 이야기에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나섰던 이들의 비범한 일면을 발견해. 대놓고 폭력을 투쟁 수단으로 선포하고 요인 암살, 기관 폭파 등 요즘 말하는 ‘테러’를 통해 일본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한 의열단이지만, 그들의 ‘칠가살’(七可殺), 즉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대상에 평범한 일본 민간인은 들어 있지 않았어. 조선 총독, 일본 군부 수뇌, 대만 총독, 조선인 매국적(賣國賊), 친일파 거두, 적의 밀정, 반민족적 토호열신만 죽여야 하는 대상이었지.


박재혁 의사가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이 일제에 일격을 가한 이후 일제는 경신대참변이라는 가공할 사건을 일으켜서 만주 일대의 우리 동포들을 그야말로 야수들처럼 찢어발기지. 그래도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일본 민간인을 습격하거나 일본인 전체를 악마로 몰아 목숨을 무차별로 빼앗지 않았어. 박재혁 의사처럼 자살 폭탄(?) 공격을 할지언정 '네 죄를 네가 알렷다'라고 꾸짖을 줄 알았고, 죽여야 할 자를 공격한다는 선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거야. 의열단뿐 아니라 임시정부가 발행하던 <독립신문> 1920년 2월5일자에 발표한 ‘칠가살(七可殺), 마땅히 죽여야 할 일곱 가지 대상’에서도 일본 민간인은 공격 대상에서 제외돼 있어.


우리 독립운동가들은 실패의 가능성을 무릅쓰고 악착같이 '죽어 마땅한 자'에게만 공격을 집중하려고 했고, 대한독립이라는 이상 때문에 필요 이상의 살인을 저지르기 꺼려했어. 물론 독립운동사에서 개인적 일탈이나 범죄적 행위가 없었다고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이름 있는 독립운동단체에서 공식적으로 일본인 양민에 대한 공격을 사주하고 과시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어. 아빠는 그게 독립운동가들이 지녔던 또 하나의 미덕이라고 생각해.


만약 윤봉길 의사가 일본의 여학교를 습격해 인질로 삼고 울며 매달리는 학생들의 목숨을 하나하나 빼앗으며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면 아빠는 그를 의사로 부르기 어려웠을 거야. 만약 이봉창 의사가 도쿄 긴자의 사람이 운집한 거리에서 폭탄을 터뜨리고 기관단총을 난사한 다음 태극기를 휘둘렀다면 아빠는 그를 존경하지 않았을 거야. 독립이라는 이상이 소중하고 그를 위한 희생이 불가피하다지만, 이상을 위해 한 집단 전체를 ‘악마’로 만들어 그 집단에 속하는 평범한 이들까지도 ‘가살(可殺)’, 즉 죽어 마땅한 이들로 돌리는 것은 야만적인 행동이니까.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중동에서 벌인 장난질과 사기와 협잡과 음모가 오늘날 중동의 생지옥의 원천임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IS라는 살인마 집단이 정당화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이란다. IS가 누구의 그릇된 정책 때문에 태어났든, 누구로부터 어떤 피해를 입었든, 그들의 이상이 무엇이든,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에게 감히 빗댈 수조차 없는 존재가 되는 거란다. 설사 악마와 싸우기 위해서라 해도 제 스스로 악마가 되는 것은 결코 긍정하거나 용인할 일이 아니야. IS의 (프랑스 정부의 발표와 IS 자신의 말대로라면) 무차별 테러로 슬픔에 빠진 프랑스 국민에게 연대와 위로의 인사를 보낸다.


김형민 (SBS CNBC 프로듀서) / webmaster@sisai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