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네안데르탈인의 슬픔 (3) 본문
(3)
주차를 하고 올라오니 아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몇 번이나 피하던 전화였는데 마지못해 받고는 한바탕 싸운 모양이다. 아이가 아팠던 아내의 친구는 자주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하소연을 했었다. 역시 아픈 아이의 어미인 아내는 어떤 때는 팔이 아파 전화기를 바꿔들면서까지 그 얘기를 곧잘 들어 주었고. 그러던 그녀가, 딸아이가 수술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는 몇 개월 동안 전화 한 번 하지 않았다. “너희 애는 수술 받아서 완치됐으니 좋겠다, 그래서 상심해서 전화 안 걸었다.” ……아무리 마음을 넓게 써도 받아들일 수 있는 변명이 아니다. 맹장 수술처럼 간단한 게 아니란 걸 뻔히 아는 처지에.
비단 그 친구만이 아니었다. 자기애가 혹시 가와사키 병인지도 모르겠다며, 병실에서 딸아이 돌보느라 정신없는 아내에게 냅다 전화를 걸어대더니만 역시 갑자기 연락을 끊은 친구도 있었다. 도저히 이해해 줄 수 없는 관심의 중단……. 이런 섭섭함은 결코 조문이나 동정을 바래서가 아니다. 우리는 딸아이와 직접 관련 있는 분들께만 연락을 했었다. 떠난 것은 딸아이였다. 장례는 떠난 자에 대한 남은 자들의 의식이지, 남아 있는 자들의 인맥이나 조의금 확인 장소는 아니었다. 그 후로도 아내의 친구들 중에는 오랜만에 안부 전화를 하다가 “자식이 아니고 원수야.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 그래, 네 팔자가 상팔자다.”라고 무심히 말하는 이도 있었지만, 아내는 그냥 “내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하고 말았다. 그 정도를 용납 못 하는 건 아니다. 모두가 긴장해서 우리만 봐달라는 게 결코 아니다.
그러고 보니 나도 두 녀석이 떠오른다. 예전에 한 녀석에게 아버지의 진료를 위해 의사의 일정을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그 녀석도 그 후 일절 연락 한 번 없더니만 용케 발인하는 아침에는 볼 수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 하겠지만, 그전에는 시험만 보고 나면 잘 봤냐며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오던 그였으니까. 또 한 녀석은 딸아이가 병실에 있는 동안 네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전화 걸 때마다 “애 퇴원했냐?”였다. 한 번은 막 입원한 후, 한 번은 급히 중환자실로 내려가 있을 때, 또 한 번은 중환자실로 내려간 지 한 달이 되어갈 때,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장례를 치른 후 해인사에 갔을 때. 그렇게 딸아이 상황을 말했건만 질문은 석 달 동안 한결 같았다. 나는 그의 영업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그 후로 그 번호가 뜨면 나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래도 의사의 일정을 알아봐주고 안부 전화도 걸어준 고마운 친구들인데, 라며 내 좁은 속을 탓해야 할까? 아버님 돌아가시기까지 한 달 넘는 동안 전화 한 번 걸어주었어도, “애 어떠니?”나 “좀 괜찮니?”만 한 번 해 주었어도, 평생 안 볼 작정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주변 사람들은 비슷했다. 어쩌다가 딸아이 얘기가 나오면 마치 실연당한 남자에게 다른 여자 얘기를 하듯 “에이, 이사님.”하면서 짐짓 밝은 농담을 하곤 했다. 글쎄, 가벼운 실연의 경우에는 맞는 해법이겠지, 나이도 제법 들고 부모님도 한참 연세 들어 돌아가신 경우에는 틀리지 않은 해법이겠지. 어떤 사람들은 그냥 가만히 있었다. 위로할 말을 못 찾았건 그럴 마음이 없었건, 그게 차라리 고마웠다. 초등학교 때 군대 간 형을 잃었고, 20대 중반에 암으로 아버지를 잃은 나도 그냥, 가만있을 것 같았다.
이전 직장은 명상과 관련이 있어서 자칭 도인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는데, 딸아이가 입원했을 때 다만 한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다. “누구나 한 번은 간다. 아이에게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집사람을 잘 위로해 줘라.” 비록 석 달 후에 그의 말이 맞긴 했지만 처음에 의사는 수술 성공 확률이 95% 라고 했었다. 설사 앞일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다 해도 그런 식으로 무식하게 말하는 자는 도인의 자격이 없다. 그냥 컴컴한 방안에 혼자 틀어박혀 내다보는 걸 즐기면 된다. 확률적으로 누군가는 불치병, 난치병으로 아픈 아이의 부모가 될 수밖에 없지만, 아무리 적은 확률이라도 일어난 사람에게는 1이다. 그렇다고 하늘에 계신 그 분도 네 곁에서 아파하고 계신다는 식의 위로가 마음에 든다는 건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