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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 아파도, 슬퍼도 참아야 했던 김시진

조용한 3류 2017. 5. 27. 17:59

난 왜 아직도 이 남자를 좋아하는 걸까...


그에게 꼭, 한 번만 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박동희의 야구인] 아파도, 슬퍼도 참아야 했던 김시진


박동희기자 2016.03.22. 10:47

(http://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3852576&memberNo=1033&vType=VERTICAL)



# 야구사(史)는 1984년 한국시리즈를 ‘최동원 시리즈’로 기억한다. 최동원은 이해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따냈다. 덕분에 롯데는 첫 우승을 맛봤다. 만약 당시 롯데가 한국시리즈 우승에 실패했다면 야구사는 ‘철완 최동원’을 전설이나 신화가 아닌 혹사의 상징으로 기록했을 것이다.


최동원만큼 팀을 위해 혹사했으나 전설이 되지 못한 사내도 있다. 그가 바로 김시진이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최동원과 맞대결을 펼친 삼성 우완 에이스 김시진은 3차전에서도 최동원과 맞붙어 8회 2사까지 2실점 하는 호투를 펼쳤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최동원을 향해 미소 지었다. 김시진이 등판한 1, 3차전에서 삼성은 롯데에 모두 패했다.


김시진이 다시 등판한 건 6차전이었다. 3승 2패로 앞서던 삼성은 김시진을 투입해 시리즈를 끝내려 했다. 그러나 이게 패착이었다. 김시진은 3회까지 무실점 호투를 펼쳤으나 4회 3점, 8회 다시 3점을 내주며 6실점 하고서 패전투수가 됐다. 


1, 3차전 호투한 투수가 6차전에 등판한 건 당연한 선택일지 몰랐다. 6실점 했다고 '패착'이라 하는 건 지나친 결과론이리라. 하지만, '패착'이라 한 덴 나름의 이유가 있다. 


김시진은 3차전 때 타구에 발목을 맞아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타구에 발목을 맞기 전부터 몸 상태가 최악이었다. 한국시리즈 중 교통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사연은 이랬다.


한국시리즈 1차전 등판을 위해 집을 나와 대구구장을 향해 차를 몰고 갈 때였다. 이때 교통사고가 났다. 그의 잘못은 아니었다. 한 아이가 차를 보지 못하고 갑자기 도로로 뛰어든 탓이었다. 김시진은 갑자기 나타난 아이를 피하려 급하게 핸들을 돌렸다. "쿵!" 소리와 함께 차는 옆 차를 박았고, 순간 김시진은 다릴 다치고 말았다.


이때 김시진이 가장 먼저 취한 태도는 차문을 열고 나가 아이 상태를 보는 것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거의 다치지 않았다. 두 번째로 김시진이 취한 행동은 곧바로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는 것이었다. '한국시리즈 1차전 등판'이란 중대사를 앞둔 그였지만, 아이 상태를 확인하는 게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마지막으로 취한 김시진의 행동은 아이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 끝까지 병실을 지키는 것이었다.


한참을 아이 곁에 있던 김시진은 의료진의 "괜찮다. 가도 된다"는 이야길 듣고 서둘러 대구구장으로 향했다. 몸과 마음이 진정될 리 없었다. 무엇보다 접촉사고로 그는 발을 다친 상태였다. 문제는 경황이 없다 보니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연한 결과였겠지만, 김시진은 19승 투수답지 않은 제구 난조와 구위 저하로 1차전 패전투수가 됐다. 3차전 8회 2사 상황에서 홍문종 타구에 발목을 맞은 건 시쳇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1, 3차전을 던지고서 김시진은 7차전에 등판했어야 했다. 이해 김시진은 4일째 쉬고 5일째 등판하는 날 평균자책 1점대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의 다친 발은 더 많은 휴식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삼성 코칭스태프는 3일 휴식한 김시진에게 6차전 등판을 지시했다. 김시진은 팀의 부름에 응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다. 6차전에서 그는 6실점 하며 무너졌다. 


김시진은 “사고 현장에서 ‘아이는 우리가 병원으로 데려갈 테니 빨리 구장으로 가라’고 하신 분이 많았지만, 야구보다 소중한 게 인명이라 생각해 구장 대신 아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갔다”며 “시계를 돌려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난 똑같은 결정을 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만약 김시진에게 갑작스러운 교통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가 7차전에 등판했다면 야구사는 지금과 다르게 쓰였을지 모른다. 만약 그랬다면 1984년 한국시리즈는 '최동원 시리즈'가 아니라 ‘김시진 시리즈’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 1987년은 김시진에겐 영광과 굴욕이 교차한 시즌이었다. 그해 그는 23승을 거두며 생애 두 번째 20승 이상을 기록했다. 그리고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100승 투수가 됐다. 김시진의 호투 덕분에 삼성도 또다시 한국시리즈 무대를 밟았다. 이 정도 업적이라면 오프 시즌의 김시진은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여기저기에 불려 다녀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정작 오프 시즌에 김시진이 있던 곳은 설악산이었다. 그는 설악산으로 떠난 뒤 두문불출했다. 주변에서도 100승 투수를 칭찬하기보단 "참 안됐네"하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전하기 바빴다. 이유가 있었다. 이해 한국시리즈에서 김시진이 부진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김시진은 이해 한국시리즈에서 단 1승도 따내지 못했다. 1승은 고사하고, '한국시리즈 7연패'란 불명예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삼성 역시 이번에도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큰 경기에 약하다'는 징크스를 떨쳐내지 못한 김시진은 한국시리즈 패배를 자기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괴로운 마음에 설악산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한 달 뒤 하산한 김시진은 이를 악물었다. '1988시즌엔 반드시 큰 경기에 약한 선수'란 오명을 벗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설욕의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1988년 삼성은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1988년 시즌이 끝나고서 김시진은 누구보다 열심히 마무리 훈련에 참여했다. '큰 경기에 약하다는 징크스를 반드시 깨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어린 후배들보다 더 열심히 훈련했다. 하지만, 이때 일이 생겼다. 서울에 계신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은 것이다. 


'효자'로 소문난 김시진은 한걸음에 서울로 달려갔다. 아들의 정성 어린 병간호 속에 어머니의 병세는 차츰 호전됐다. 아들은 그런 어머니를 보며 다시 한 번 '큰 경기 징크스에서 벗어나 어머니께 큰 선물을 드리겠다'고 다짐했다. 보름가량의 병간호를 마친 김시진은 대구로 돌아왔다. '이젠 한시름 놓았다'며 긴장을 풀 무렵.


대구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아닌 트레이드 소식이었다. 김시진이 대구에 도착한 날. 삼성과 롯데는 양팀 에이스 최동원(롯데)과 김시진(삼성)을 맞바꾸는 충격적인 트레이드 결과를 발표했다. 


김시진은 망연자실했다. 거대한 나무망치로 뒷목을 받은 느낌이었다. 당시만 해도 트레이드는 '팀이 선수를 버리는 행위'로 간주되던 시절이었다. '내가 삼성을 위해 얼마나 희생했는데…' '아파도 참고, 슬퍼도 참고 팀을 위해 마운드에 올랐던 나한테 어떻게…'


김시진은 삼성이 야속했다. 그래서 은퇴를 결심했다. 삼성에 버림받느니 차라리 유니폼을 벗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를 말린 게 가족이었다. 가족은 "병상의 어머니를 위해 이럴 때일수록 더 강해져야 한다"며 김시진의 등을 다독였다. 


방황 끝에 김시진은 롯데로 가기로 마음먹었다. 어머니의 병세 악화와 트레이드 충격으로 5kg이나 체중이 빠졌던 김시진은 모든 걸 '툭툭' 털고 부산으로 떠났다. 세월이 흐른 후, 김시진은 이렇게 말했다.


"만약 제가 어머니 곁이 아니라 계속 운동장에 남아 훈련했다면 어땠을까 싶어요. 그랬다면 삼성에서도 '아, 김시진이 내년엔 다르겠구나'하는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제가 어머니 병 간호를 위해 서울로 가면서 '저 친구, 내년에도 틀렸어'하는 생각을 했을지 모르죠. 하지만, 시간을 돌려 그때로 돌아가도 제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을 거예요. 마운드는 어느 팀 유니폼을 입어도 언제든 다시 올라갈 수 있지만, 어머니는 제게 하나뿐인 분이니까요."



# 2013년 2월. 기자는 일본 가고시마에서 전지훈련 중이던 롯데 캠프를 찾았다. 그곳에서 기자는 롯데 사령탑이던 김시진과 '감독과의 대화'란 실시간 문자 중계 인터뷰를 진행했다. 롯데의 캠프 상황과 한 시즌 구상을 듣는 자리였다. 30분가량 인터뷰가 진행됐을 무렵. 


어떻게 하다 화제가 흘러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게 됐다. 김시진은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고민을 들려줬다.


"어머니가 치매로 고생 중이십니다. 25년 전 큰 병을 이겨내셨던 분이 이번엔 치매와 싸우고 계세요. 우리 형제 모두 어머니의 쾌차를 바라는데…이게 생각보다 어렵네요. 휴우-. 다른 건 모르겠는데 어머니가 자꾸 밖으로 나가시려고 해서 그게 걱정이에요. 한번 나가시면 집을 찾지 못하시는데…. 행여 어머니가 영원히 집으로 돌아오시지 못할까 봐 걱정입니다."


감독의 말을 타이핑해 '실시간 문자 인터뷰'를 진행하던 기자는 잠시 진행을 멈췄다.


"형제들이 머릴 맞대 고민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집에 계시면 분명 밖으로 나가시려고 할 텐데, 그러면 큰 사고가 날 수 있어 다들 고민과 걱정이 많습니다. 잘 아는 분이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시면 어떠냐, 그게 어머니를 위해 더 좋을 수 있다. 내가 좋은 곳을 소개해주겠다'고 하는데…휴우-. 모르겠어요. 뭐가 어머니를 위해 좋은 선택인지…. 우리 어머니 고생하신 걸 생각하면…."


그때였다. 김시진의 두 눈에서 소금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기자는 노트북 자판에서 손을 뗐다. '실시간 문자 인터뷰'가 중단되는 순간이었다. 기자는 문자 인터뷰 창에 '현지 사정으로 인터뷰가 잠시 중단됐다'는 안내문을 올린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은 창밖으로 돌렸지만, 창에는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두 남자가 비치고 있었다. 


김시진은 이때도 자신의 아픔과 슬픔을 내색하지 않았다. 롯데 감독이 되고서 그는 감독직에만 집중했다. 개인사를 뒤로 한 채 일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머릿속으론 '어머니를 어떻게 모셔야 하나' '정말 요양원으로 보내 드리는 게 어머니를 위해 좋은 선택일까'하는 고민을 치열하게 했을 테지만, 선수와 언론 앞에선 일절 그런 이야기를 삼가고, 팀과 야구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어쩌면 그래서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쌓였던 감정이 터져 나온 것인지 몰랐다.


김시진의 절친인 이만수 전 SK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시진이는 원래 그런 친구였어요. 어릴 때부터 자기감정을 숨겨왔던 친구예요. 자기보단 자기 주변 사람을 먼저 챙겼어요. 혹시 자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흔들릴까 봐 그걸 더 염려했어요. 화가 나면 화가 난다 말하고, 슬프면 슬프다고 이야기하고, 뭔가가 필요하면 필요하다고 주장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시진이는 그걸 가슴 속에 숨긴 채 자기 혼자 삭였에요. 원체 생각이 깊은 친구라, 주변 사람들이 시진이의 아픔과 슬픔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죠. 감독이 돼서도 혼자 생각을 곱씹고, 인내하고, 자기 혼자 삭이는 건 변함없는 거 같아요. 가끔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친구로서 안타깝고, 제 마음마저 아프곤 하지만, 제가 도와줄 게 많지 않아 늘 미안할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김시진은 감독이 된 이후 혼자서 감정을 삭이는 일이 꽤 많았다. 현대 감독 시절엔 해체 위기에 몰린 팀을 맡아 혼자서 전전긍긍했고, 넥센 감독이 되고선 팀 사정으로 다른 팀으로 떠나야만 하는 선수들을 속절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롯데 감독이 되고서도 '보이지 않는 손'의 개입과 간섭으로부터 선수단을 지켜내고자 혼자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리더십과 능력을 떠나 김시진이 세 번의 감독 생활 동안 어느 감독보다 많은 가슴앓이를 한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 3월 20일. 잠실구장에서 오랜만에 김시진을 만났다. 롯데 감독에서 물러나 지금은 KBO 경기감독관으로 일하고 있는 김시진은 "삼성 새 야구장 개장 행사에 갔다가 정말 오랜만에 마운드에 올라 공을 던졌다"며 "수많은 고향 팬 앞에서 투구하자니 심장이 떨려 혼났다"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 김시진만 떨렸겠는가. 1987년 겨울 김시진을 롯데로 떠나보내야만 했던 올드 삼성팬들 역시 다시 대구구장 마운드를 밟고 있는 김시진을 보고서 심장이 떨리긴 마찬가지였으리라.


지난해 프리미어 12에서 대표팀 전력분석파트를 이끌었던 김시진은 "전력분석팀이 주던 자료만 보다가 내가 직접 전력분석을 하니 야구가 더 새롭게 보였다"며 "이때의 경험이 향후 야구 인생에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감독에서 물러났다고 '야구인 김시진'의 수명과 학습이 끝난 건 아니다. 김시진은 KBO가 진행하는 유소년 야구클리닉에 참가해 어린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고 있다. 지난해는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야구 연수를 떠나 두 달 동안 일본 프로야구를 세밀하게 살폈다. 


김시진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 야구인도 그라운드를 떠나 살 수 없는 법"이라며 "시시각각 변하는 야구의 흐름을 따라가려면 항상 배우고, 익히고, 경험하는 수밖엔 없다"고 강조했다.


말이 나온 김에 김시진에게 기자가 물었다. "다시 현장으로 돌아오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김시진은 빙그레 웃더니 자신의 속내를 밝혔다. 


"다시 감독으로 돌아가면야 좋겠죠.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개인의 욕심보단 야구 발전이나 후배들을 위해 백의종군하고 싶을 뿐입니다. 제 노하우와 경험이 유용하게 활용될 수만 있다면 인스트럭터도 좋고, 코치도 좋아요. 2군도 상관없습니다. 제가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돕고 싶다는 생각밖엔 없어요. 그것이 '감독 김시진'이 아니라 '야구인 김시진'으로 사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아파도 참고, 슬퍼도 참았던 김시진에게서 기자는 그와 만난 이후 처음으로 그의 담백한 속내를 들을 수 있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원하는 게 있어도 원한다 말하지 않고, 바라는 게 있어도 바란다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자는 그가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그가 '김시진'이란 묵직한 이름값과 의무감 그리고 책임감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할 뿐이다. 


한국야구계가 '김시진'이란 훌륭한 자산을 잘 활용했으면 좋겠다. 몇 년 전 KIA 감독에서 물러나 삼성 포수 인스트럭터로 일하며 후진양성에 애썼던 조범현 kt 감독처럼, 많은 전직 감독이 다시 후배들과 함께 그라운드에서 땀을 흘리는 장면이 연출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것이 한국야구계 발전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