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이스라엘사[1] (최창모, 200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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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제 발생 요인
즉, 예언자들은 왕정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군주제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 요청은 출애굽 이후 유지해 온 이스라엘의 평등주의 이데올로기(cf. 사무엘기상 8:11~17)와 야훼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서 이탈한 것이라고 보았다(사무엘기상 12:19). (이스라엘사, 최창모)
솔로몬
국민들의 노동력에 의존한 대규모 건축 사업은 강제 부역을 위한 행정 조처를 필요로 하였으며, 국민들의 대부분은 적어도 1년 중 30일을 의무적으로 노역하였다(왕상5:14). 국내 경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과도한 대규모 건설 사업, 특히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을 짓기 위해 사들여 온 외국산 목재와 금속 등의 수입으로 외채의 지불 능력을 상실한 솔로몬은, 급기야 북쪽 갈릴리 영토의 일부를 떼어 팔아 버리는 상황에 이르렀다(왕상9:10~14).
남북 왕조사
둘째, 왕들의 행적과 진술(陳述)에 대한 평가는 왕의 치적이 얼마나 크고 중요하였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이 예루살렘 성전 밖에서 수행되었던 예배를 허용하였느냐, 아니냐에 따라 철저히 내려졌다. 이러한 신명기 사가의 신학은 기원전 7세기 남유다의 요시야 왕에 의해 확정된 것으로써 모든 역사를 그러한 시각에서 평가하기 시작하면서 내려진 결과였다. 이러한 원칙에 따르면,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은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신명기 사가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기록에 불과 140여 절밖에 할애하지 않았으며, 이는 솔로몬의 40년 통치에만 162절을 할애한 것과 비교되는 것이다. 그 밖에 남유다의 왕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히스기야와 요시야 왕만은 무조건 인정을 받았다.
북이스라엘의 몰락과 멸망
이 시기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에는 여로보암 2세와 웃시야 같은 유능한 왕이 있어 새로운 부흥을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중략) 이 기간 남북 관계도 매우 원만하였으며, 솔로몬 시대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사회 내부의 부패로 이어져 망국병으로 번져 나갔다. 이 시대 북이스라엘 사회의 두드러진 빈부의 격차는 부패의 표상이었다. 부자들의 탐욕은 부정적인 관행을 낳았으며, 권력을 이용한 재산의 강탈과 토지의 몰수는 가난한 자들이 생활고(生活苦)에서조차 구제받을 길을 차단해 버렸다(아모스서 2:6f., 5:10~12, 8:4~6). 사회적 부패는 종교적 부패와 보조를 같이하였다. 대부분의 성소에는 예배자들로 붐볐지만(아모스서 4:4f., 5:21~24), 순수한 형태의 야훼 신앙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다. 가나안의 토착 신 바알과의 혼합주의는 야훼의 신앙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혼합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드고아 목동 출신의 아모스와 사랑했던 아내의 배반을 경험한 호세아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바빌로니아 시대 - 멸망과 이산
기원전 586년 이스라엘 멸망의 배경은 대략 이렇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의 우방은 이집트였다. 기원전 721년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의해 멸망할 때에만해도 남유다 왕국은 이집트의 보호로 왕조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신흥 제국으로 떠오른 바빌로니아의 힘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보호하기에 이집트는 너무 약했다. 스물한 살에 즉위하여 11년간을 다스리던 남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열왕기하 24:18)는, 당시 활동한 예언자 예레미야의 강력한 권고(예레미야서 27장)에도 불구하고, 국제 질서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채 선왕이 맺은 바빌로니아와의 맹약을 깨뜨리고(열왕기하 23:29 ff., 25:1) 친이집트 외교에 집착했다. 약소 국가의 반역은 대제국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을 신속하게 팔레스타인에 불러들인 결과를 낳고 말았다.
흩어진 사람들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의 경우, 멸망 이전에 지키던 전통과 신앙에 대한 재정립이 요구되었다. 특히, 성전 파괴 이후 몰아닥친 엄청난 재앙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신앙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만들었다. 그들은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이 비유대인의 손에 멸망당한 까닭은 무엇이며, 이스라엘을 '영원한 기업'으로 삼겠다는 다윗과의 약속은 파기된 것인가? 하는 질문과 더불어 절망에 빠지게 되었다(이사야서 63:19, 에스겔서 33:10, 37:11).
새로운 희망은 싹트고
성전 예배가 불가능해지면서 성전 없이도 가능한 새로운 예배 형식과 공동체를 창조해 내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점차 성전보다 율법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바뀌어 갔다. 여기서 제사장의 지위에 버금 가는 율법 교사의 역할과 지위가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다시 말해서, 새로운 공동체의 재건은 율법을 통해 이룩될 수 있음이 강조되었다. 성문화된 토라가 바로 이 시기에 집대성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낯선 세계에서 생존의 한 방식으로써 자신들의 오래 된 기억과 전통을 재구성함으로써 자기 동일성을 구체화하려 했던 것이다. 이제 토라는 단순히 공동체와 그 일원을 규제하는 수단이 아니라, 공동체를 창출하고 결속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마련해 주는 주체가 된 것이다.
"나의 목자, 나의 메시아"
적어도 유대인들에게 고레스 칙령은 꿈 같은 소식이었다. 비록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정치적 독립을 가져다 준 것은 아니었지만, 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 모두가 귀향한 것도 아니었지만, 예언자 이사야는 고레스를 일컬어 '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이'(이사야서 45:1), 즉 '나의 메시아'라 불렀으며, 또 '내가 세운 목자'(이사야서 44:28, cf. 시편 23:1)라 칭하며 이 칙령의 역사적 중요성과 그 의미를 강조하였다. 유대인들은 고레스의 등장을 다윗 왕조의 회복(이사야서 11:1~16, 54:10)과 성전의 재건(이사야서 44:28, 45)이라는 꿈 같은 희망을 실현하게 해 주는 신의 구원사적 사건으로 해석하였던 것이다.
외세를 끌어들인 왕조의 쇠락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폼페이는 깊은 골짜기와 높은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시를 공격할 채비를 해 나갔다. 성 안에는 아리스토불러스 2세의 지지 세력인 사두개파 사람들과 힐카누스 2세의 지지 세력인 바리새파 사람들 간의 분란이 계속되었다. 사두개파는 로마에 저항하려 하였고, 바리새파는 성문을 열어주려 하였다. (중략)
폼페이는 하스모니안 왕조가 정복한 여러 도시들 - 힙포, 스키토폴리스, 펠라, 사마리아, 마리사, 가자, 욥바, 그리고 얌니아 등 - 을 다시 원주민들에게 돌려 주어 독립시켜 주고,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다는 시리아의 로마 행정관이 직접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써 79년간 유지되던 하스모니안 왕조는 해체되고, 그 후 몇 차례 하스모니안 세력의 마지막 항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로마의 팔레스타인 주둔은 장기화되면서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유다의 멸망
마카비 전쟁 때부터 시작된 종말론적 희망은 백성들 사이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았으며, 메시아 운동은 민중들에게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갈릴리 지방을 시작으로 유대 반란을 이끌며 정치적 메시아 사상으로 무장한 유대인들을 일컬어 소위 열심당(ζηλωτηѕ)이라 불렀는데, "그들은 아주 끈기 있게 자유에 매달려 있으며, 신만을 그들의 왕으로 인정하였다."(고대사 18.23) 이들은 무장 투쟁을 통해 메시아 사상을 이 땅에 구현시키려는 종말론적 신앙을 가진 자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생명을 내걸고 싸움으로써 진정한 메시아 왕국을 이 땅 위에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일부 하층민의 경우 메시아적 가르침을 가장 잘 따랐다. 이들 중에는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동조하는 자들이 많았으며, '시카리(자객들)'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파벌 내에서 다소 의견이 갈리는 경향을 띠기도 하였다. 그러나 급진적인 정치 사상은 유대 반란 초기에 상류층의 젊은 세대를 사로잡고 있었다. 로마의 행정관을 예루살렘 밖으로 몰아 낸 혁명의 지도자는 바로 대제사장의 아들이었다(유대전쟁사 2.234~235). 이러한 기록은 아마도 요세푸스 자신 역시 귀족 출신의 젊은 혁명 지도자였으며, 갈릴리 저항군을 이끌던 장군이었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것이리라.
성전과 토라, 사두개파
성전의 경비, 제의 집행, 토라의 해석은 제사장의 몫이었다. 그들이 세운 것은 귀족 정치였다. 제사장 통치 가문은 동시에 땅을 소유한 부호 가문이었으며, 그리스 시대 제사장들이 과거처럼 낡은 방식의 보수주의자였다는 생각은 결코 옳지 않다. 그들은 누구보다 그리스 문화에 열려 있었다. 사독 가문의 오니아스 대제사장의 헬라화 정도는 극심하여 보수적인 사람들을 자극하여 마카비 전쟁을 일으킨 요인이 될 정도였다.
요세푸스는, 사두개파 사람들은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영혼도 사라진다고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다(고대사 18.16~17). 그들은 보상과 징벌은 오직 현세의 삶과 관련된 것이며, 그것은 자기 의지에 따라 행동한 결과일 뿐이며 운명 같은 것은 없다고 믿었다(고대사 13.293).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사두개파 사람들이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주장했다는 보도와 일치하는 것이다(사도행전 23:8)
예수와 하나님 나라
예루살렘의 유대 - 기독교 공동체는 유대인의 종교 공동체 내의 한 집단이었다. 성전 제의에도 참여하고, 할례도 행하고, 유대 음식법도 지켰다. 그러나 이들은 성령 체험 이후 자신들을 유대 공동체와는 다른 집단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영을 소유한 그들은 한 마음과 한 뜻으로 누구 하나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주장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으며, 가지고 있던 땅이나 집을 팔아 공동체에 헌납하였다(사도행전 4:32~37). 공동체의 인구 수가 불어나자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일곱 사람을 뽑아 공동체의 일을 담당하도록 하였으며, 사도들은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몰두하였다(사도행전 6:1~7).
유대 - 기독교 공동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기독교 공동체 내에는 자신들의 정체를 유대교의 연속선상에서 볼 것인가 아니면 독립된 형태의 새로운 공동체로 정의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되었다. 결국 디아스포라 출신의 바울의 기독교가 주도권을 쥐고 반대자들을 교회 밖으로 몰아 냄으로써 기독교는 사실상 유대교의 전통과 분리되었다. 성전 멸망 이후 유대교가 '성전에서 토라로' 달려가고 있는 동안, 기독교는 '예루살렘에서 로마로' 각각 달려가고 있었으며, 유대교가 헬라주의자들을 거부하고 바리새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한 팔레스타인 유대교로 발전해 가는 동안, 초기 기독교는 유대 - 그리스도인을 배제하고 비유대 - 그리스도인을 중심으로 한 서양(헬라) 기독교로 달려나갔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