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이스라엘사[2] (최창모, 200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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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사[2] (최창모, 2007)

조용한 3류 2024. 8. 5.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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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와 유대교
그러나 교회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로마법은 유대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교도와 아리우스파 기독교를 맹렬하게 탄압하였지만, 유대인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유대 나시 직무를 인정하고 힘을 실어 주었으며, 회당을 보호하였다. 이러한 로마 정부의 관대한 경향은 테오도시우스 2세에 와서 변화를 보이는데, 415년에는 새로운 회당을 짓지 못하도록 제재를 가하였고, 쓰지 않는 회당은 파괴하도록 권고하였다. 또, 유대인이 아닌 사람을 유대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금지하였고, 기독교인 노예는 교회로 귀속되게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결국 429년에 나시 직무의 폐지로 이어지게 되는데, 기록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418년에서 429년 사이에 나시 직무를 폐지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게마라와 탈무드
어원에서 볼 수 있듯이, 구전 토라를 가르치는 것이 성문화된 토라의 '완성'으로 볼 수 있다. 미쉬나와 미쉬나에 대한 주석인 게마라를 합쳐 탈무드라고 부른다(미쉬나+게마라=탈무드). 탈무드라 하면 '행하는 것'(maase)과 비교된 개념으로 '공부하는 것' 혹은 '가르치는 것'이라는 뜻이다. 탈무드는 5세기 초에 팔레스타인에서 집대성된 예루살렘 탈무드〔Talmud Yerushalmi, 예루살렘에서 집대성되지 않았으므로 팔레스타인 탈무드(Palestine Talmud)가 더 적당한 표현이다.〕와 6세기 초에 바빌로니아에서 집대성된 바빌로니아 탈무드(talmud Bavli)가 있는데, 일반적으로 '탈무드'라고 하면 바빌로니아 탈무드를 가리킨다.

 


비잔티움 시대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혁신적인 조처 중의 하나는 유대법, 즉 토라를 국가법과 동등한 규정으로 적용시킨 것과 기독교 내의 각종 제도를 유대교의 제도들로부터 분리시켜 나간 것이었다. 나아가 성서 해석에 있어서도 유대교적인 전통과 관점으로부터 떠나 기독교적인 방식에 의해 성서를 해석해 나갔다. 이를 위해 유대인의 성서 해석서인 미쉬나를 금서로 지정하기도 하였는데, 미쉬나는 하늘의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지상의 인간의 작품이며, 유대 랍비들의 해석은 성서의 가치를 모두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교황 그레고리 1세는 유대인을 기독교인과 맞서 하나님의 선택권을 놓고 싸우는 관계로 규정하였다. 그는 욥기를 해석하면서 유대인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비판하였다. 황제는 유대인들이 메시아를 거부하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일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면서, 하나님의 선택과 약속이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옮겨 오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유대인은 에서요, 이방인이었던 기독교인은 야곱이었다. 동시대의 교부들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기독교와 유대교의 궁극적인 차이를 주장하였다. 황제는 이러한 신학적 입장에서 유대인들의 행동을 제약하였다. 유대인이 회당을 새로 짓는 일을 금하였으며, 기독교인이 되지 않은 유대인들을 법으로 차별하였다.


페르시아가 팔레스타인에 이르렀을 때, 유다의 남은 자들은 페르시아와 연합하여 기독교인들과 맞서 싸웠다. 유대인들은 갈릴리로부터 가이사랴, 룻다를 거쳐서 614년 5월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을 정복하였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페르시아는 마기(Magi) 승족의 명령에 따라 콘스탄티누스와 헬레나(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친)와 유도시아(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아내)와 유스티니아누스의 예루살렘 교회에 불을 질러 파괴하고, 유대인의 협조를 얻어 닥치는 대로 사제와 수도자들을 살해하였으며 기독교인을 추방하였다. 이때 유다 광야에 세워진 마르 사바(Mar Saba) 같은 수도원이 불탔고, 여러 수도원에 머물던 수천 명의 수도사들이 화형에 처해지기도 하였다.


이슬람 시대
712년, 이슬람 제국이 동쪽 인도의 국경으로부터 피레네의 전 지역을 통치하게 되면서, 흩어진 대부분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이슬람의 통치권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유대인들은 차별을 받기 시작하였다. 유대인의 거주 · 이전의 자유가 조금씩 제한받기 시작하였으며, 상업 활동도 역시 크게 제약을 받았다. 나아가 새로운 아랍 문화는 유대인들의 언어 생활 및 종교 생활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아랍어가 유대인의 히브리어와 아람어를 완전히 대체시키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10세기의 유대 종교 사상은 대부분 아랍어로 기록되었다.

1077년 예루살렘은 투르크(셀주크)의 손에 떨어졌다. 다시는 움마야드의 자유로운 지배 같은 시절은 오지 않았다. 권력은 차갑고 잔인한 통치자의 손에 넘어갔으며, 고향으로 돌아간 순례자들의 발걸음은 뚝 끊어졌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서쪽의 지원을 호소하였다. 서쪽의 라틴 공동체는 더 이상 10세기의 무질서한 봉건 시대가 아니었으며, 교황권은 40년 동안 개혁되어 갔다. 교황 그레고리 7세(1073~1085)의 통치하에서 당대의 왕에 대한 도덕적 권위는 통치가 가능할 만큼 충분히 힘을 발휘하였다. 스페인과 게르만과의 전쟁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즉각적인 지원을 하지는 못했으나, 우르반 2세(1088-1099)가 교황이 되자 그는 1095년 11월 27일 클레르몽 공의회(Council of Clermont)를 소집하고 기독교 세계 전체에게 성지의 회복을 위한 그의 원대한 계획을 발표하였다. 십자군이 소집된 것이다. 1099년 십자군은 이슬람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포학한 학살을 자행하고 예루살렘을 정복하였다. 도시에는 시체와 피가 가득하였다.


십자군 시대
살라딘은 칼리프 오마르가 처음으로 예루살렘에 들어왔을 때 이 건물을 보존한 것처럼 성묘 교회를 파괴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위 사원 위에 걸려있던 "십자가를 쳐 넘어뜨리자 프랑크족은 물론 무슬림까지 큰 울음을 터뜨렸다. 무슬림은 '알라는 위대하시다!'라고 소리쳤고, 프랑크족은 심히 괴로워 울었다. 서로 외치는 소리가 너무 커 땅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하여 약 200년간 예루살렘의 주인 노릇을 하던 십자군은 물러났고, 예루살렘은 더 이상 기독교도의 도시로 다시 태어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