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맥성의 하루 (1) 본문
2008년 이른 봄에 쓴 글입니다.
맥성의 하루
나는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다. 아무리 찾아도 스승은,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졸았던 것 같다. 성 안이 소란스러워 돌아보니 사정은 말이 아니었다. 치료를 포기했는지 부상당한 병사들은 신음을 흘리며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그나마 성하게 보이는 자들도 창에 기댄 채 졸거나, 아니면 넋을 빼놓은 듯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관공(關公)을 뵙기 위해 대청으로 서둘렀다. 안으로 기별을 넣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밖으로 새어나오는 관공의 목소리는 이런 상황에서도 조금도 위엄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래, 원군을 청하러 간 요화는 소식이 있느냐?”
“요장군이 새벽에 떠났고 이제 정오를 지났으니 빠르면 원군의 기별이 올 때입니다. 그러나…… 좀 더 기다려봐야겠지만 유봉과 맹달이 선뜻 나서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억양이 거의 없는 말투로 보아 왕보가 틀림없었다. 그는 번성 공략을 나서기 전에 형주 방비를 좀 더 믿을 만한 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관공께 진언을 했었다. 그러나 관공은 이를 듣지 않았다.
“유봉은 폐하의 양아드님 아니신가? 설마 숙부의 위태로움을 보기만 하겠는가?”
“예전에 관공께서 훗날의 정사를 위해 양아들인 유봉을 멀리하라고 폐하께 아뢴 적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도성에서 먼 곳으로 자신과 맹달을 보냈다고 생각할 겁니다.”
누군가의 물음에 왕보가 대답했다.
이윽고 나는 걸어 들어가 한층 무른 대추빛으로 달아오른 관공의 얼굴을 바라보며 예를 올렸다.
“현정(顯正)이 왔구나. 내 이미 얘기 들었다. 그래, 군사(軍師)께서는 뭐라 하시더냐?”
“제가 떠날 때는 관흥(關興)이 형주의 승리를 알릴 때였습니다. 군사께서는 승리를 찬양하셨고 다만 이럴 때에 오(吳)가 변심하여 위(魏)와 함께 앞뒤로 공격해올까 염려하셨습니다.”
“……내게 형주를 맡기고 떠날 때도 오와는 사이를 좋게 하여 북으로 위를 막으라고 했었지.”
“아버님, 다 지난 얘기를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우리는 방금 회유하러 온 제갈근을 내쫓았습니다. 그 사람이 군사의 형님만 아니었다면 이미 머리와 몸은 하나가 아닐 것입니다.”
“네 말이 맞구나, 평(平)아. 다 지난 얘기다. 내 어찌하다 그 푸른 눈, 붉은 수염의 쥐새끼 같은 손권에게 속았단 말인가……. 그래, 형주의 다른 소식은 없는가? 나를 대신하여 형주를 지키던 자들은 다 무얼 하고 있단 말이냐?”
“적에게 사방이 포위되어 있으니 사정을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어제 난군(亂軍) 중에 들은 소문으로는 모두가 겁을 먹고 있는데 어떤 놈이 나서서 항복을 선동했다고 합니다.”
왕보의 말에 봉(鳳)의 눈이 부릅떠지고 삼각수염이 거슬러 올랐다. 관공은 화를 억누른 채 마저 물었다.
“항일의 소식은 없는가? 그가 난군 중에 죽지 않았다면 형주가 적의 손에 들어가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을 테다.”
“그런데…….”
“그런데, 뭐냐?”
“소문에 따르면 관리들을 모아서 항복을 부추긴 자가 항일이라고 하옵니다.”
곧바로 관공은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강하게 가로 저었다.
이때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모두 밖으로 뛰어나가 적진을 바라보니 여몽이 대군으로 성을 둘러싼 채 장수 몇을 데리고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 중 한 장수가 편지를 매단 화살을 성안으로 쏘아 올렸다. 병사가 급히 갖고 온 글을 보니 마지막으로 항복을 권유하는 내용이었다. 내일까지 말미를 줄 것이고, 그래도 항복하지 않는다면 전군으로 들이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관공의 칠한 듯한 눈썹이 빳빳이 일어났다. 옆의 활을 들더니 화살을 매겨 가득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푸른 허공을 끊고 번개처럼 여몽을 향해 날아들었다. 여몽도 돌에 불꽃이 튀듯 말위에서 창을 들어 화살을 쳐 냈다. 양쪽 다 한 치 빈틈없는 솜씨다.
“허허, 관공께선 여전하시오이다. 그러나 기백만으로 천하를 받들 수 있겠소이까. 예전에 장요의 설득을 좇아 조조에게 몸을 굽히신 걸 기억합니다. 제가 장요만 못하지만 오의 주인께서는 조조보다 나으시니 잠시 몸을 굽히시어 오와 함께 위를 도모하심이 어떻소이까?”
여몽은 관공의 화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쓴 웃음을 띤 채 이죽거리더니 느릿느릿 말을 돌렸다. 여몽이 말을 돌리는 사이, 뒤에서 대기하던 옛 형주 관원들이 몇몇 보였다. 얼핏 항일의 모습도 본 듯했으나 너무 거리가 멀었다. 맥성은 다시 새 한 마리, 쥐 한 마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철통같이 둘러싸였다. 가을 햇살 아래 모두와 끊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