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맥성의 하루 (4) 본문
다시 관공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요화가 청하러 간 원군은 안 올 것 같다. 식량도 거의 떨어졌다. 내일이면 적들은 물밀 듯 밀려 올 것이다. 무슨 계책이 있는가?”
“지금 상황은 강태공과 장자방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어쩌지 못할 것입니다. 관공께서는 몸을 빼내 서천으로 가시어 다음을 기약하소서.”
왕보에 흐느끼는 말에 사람들은 드문드문 고개를 끄덕였고 관공은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그 방법밖에는 없겠지……. 아까 이곳 토박이한테 물으니 북문 쪽으로 작은 길이 있어 서천으로 이어진다는구나.”
다시 왕보가 아뢴다.
“좁은 길에는 적의 매복이 있을 겁니다. 차라리 큰길을 취하십시오.”
“내 생각하지 못한 바는 아니나 첩첩히 둘러싼 적진을 적은 병력으로 어찌 빠져 나가겠느냐? 그리고 그깟 매복쯤을 내가 두려워하겠느냐.”
나는 공손히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관공께 말씀을 올렸다.
“제가 성도를 떠날 때 군사께서 금낭을 주셨습니다.”
그 순간,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놀람과 동시에 한줄기 기대감, 그리고 그 얘기를 왜 이제야 꺼내는가 하는 질책이 보였다. 난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방금 열어 보니 ‘대로무문(大路無門)’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매복이 있을 소로(小路)는 피하시옵소서.”
“저 철통같은 여몽의 진을 어찌 뚫겠는가?”
관평 장군은 어이없다는, 오히려 하소연하는 투로 내게 물었다.
“금낭에는 더 이상 말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나라가 변심을 했다면 지금 이런 상황으로 내몰릴 것을 군사께서는 내다 보셨을 겁니다.”
관공은 아무런 표정 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현정은 공명을 따라 서천으로 간 이후, 옆에서 계속 그를 모셨다. 어디 네 생각을 말해 보라.”
“지금 맥성에는 적의 세작이 들어와 있을 겁니다. 혹은 항복하러 성을 넘은 병사들이 이곳 사정을 알릴 것입니다. 아마 저들은 성도에서 사람이 온 걸 알 것이고 원군이나 식량 사정도 알 것입니다. 적이 내일을 시한으로 준 것은 우리를 겁박하여 오늘밤 미리 도망가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한 병사가 삼백 정도이니 대로는 취하지 못할 것이고 북쪽 소로를 통해 도망갈 것으로 보고 매복을 할 것입니다.”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스승의 뜻을 옳게 읽고 있는지, 잘못해서 모두를 위태롭게 하는 건 아닌지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보다 더 위태로울 수 있으랴.
“세 가지 방책이 있습니다. 첫째, 우리와 적의 군세는 지금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그 점을 이용하십시오. 북문 밖 소로에는 새 한 마리 빠져 나갈 수 없게 그물을 던져 놓겠지만, 북문을 제외한 큰길이 있는 쪽은 병사는 많으나 오히려 방심하고 있을 겁니다. 한 사람을 관공으로 위장하여 북문으로 가게 하고, 관공께서는 큰길로 가시옵소서. 둘째, 제갈군사께서 곧 대군을 이끌고 한편으로는 맥성을 구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물길로 형주를 공략한다고 소문을 퍼뜨리옵소서. 성도에서 온 자가 소식을 갖고 왔다고 하면 좋을 것입니다. 셋째, 먼저 조용히 북문으로 나가고 잠시 후에 큰길로 나갑니다. 적들은 양쪽으로 우리를 쫒으면서 곧 성을 들이칠 것입니다. 이때 몇 명을 성 안에 숨겼다가 사방에 불을 놓아 마치 계략이 있는 것처럼 적을 당황하게 하옵소서. 그러면 여몽은 우리가 군사의 계책을 받들어 관심을 큰길과 성으로 유도하고는 결국 북쪽으로 도망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윽고 하나둘씩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다른 길도 없었고, 무언가를 도모할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모두 관공을 위해서 하나 뿐인 목숨을 내놓고 있었다.
“아니 된다. 내가 아직 구차하게 남의 목숨을 빌어 내 목숨을 구한 적이 없다. 더구나 그대들은 나와 고락을 같이 한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아닌가? 나는 여몽과 한판 싸움을 벌여 장렬하게 여기서 죽을 뿐이다.”
“관공께서는 살아서 서천으로 가셔야 합니다. 혹시 저희가 유명(幽明)을 달리하게 되더라도 위와 오를 멸하셔서 저희의 한을 풀어 주소서.”
장수들은 모두 비장한 눈물을 뿌렸다. 결국 관평 장군이 관공을 모시어 큰길로 가고, 주창과 조누가 북쪽 소로로 가고, 그리고 나와 왕보가 성에 남기로 하였다. 남은 밥을 모두 지어 먹고 해시(亥時)에 떠나기로 했다.
나는 사람들이 제각기 준비를 위해 흩어질 때, 따로 관장군의 소매를 끌어 자리를 옮겼다.
“형님. 형님도 혼자 가셔야겠습니다. 관공은 제가 모시지요. 제 무력으로는 오래 버틸 수가 없어 정말 죄송합니다. 만일을 위해 다른 분께는 말씀하지 마십시오.”
관장군은 영문을 몰라 하더니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로무문. 큰길에 문이 따로 없다는 말은 무수히 문이 많다는 말이기도 했다. 큰길로 이어진 성문 하나와 북쪽 소로에 병사들이 몰리고 성안에 화광이 충천하게 되면, 그 혼란한 때를 타서 또 다른 빈틈을 골라 관공과 내가 뚫고 나가는 것이다.
나는 몇 명의 병사를 풀어, 제갈군사께서 두 길로 군대를 내어 형주를 구하러 오고 있다는 소문을 내었다. 병사들의 사기는 눈에 띄게 오르고 있었다. 나는 성 안을 한 번 둘러 본 다음에 성에 올라 적진을 내려다보았다. 드디어 어둠이 완전히 내렸다. 아침이면 모든 게 이미 정해져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