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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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일상에 필요한 이유
21세기가 되기 전이다. 경비아저씨의 연락에 나와 아내는 아파트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우리 차가 남의 차를 긁었다는데 무슨 소리인지... 어둠 속에서 멀리서 봐도 씩씩거리고 있는 50대 여성이 보였고 랜턴으로 차 두 대를 번갈아 비추고 있는 경비 아저씨가 보였다. 은회색 우리 차 범퍼에는 청록색이 묻어 있었고, 청록색 차에는 은회색이 묻어 있었다.
"그럴 양반이 아닌데..."
그동안 나이 지긋한 경비아저씨는 나를 변호한 듯했다. 아내는 증거 앞에서 선뜻 나서지를 못했다. 근처의 초등학교 교장이라는 50대 여성은 상당히 흥분한 상태였다. 오늘은 자기가 작심하고 주차장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고,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긁어 놓고 모른 척하면 어떡하냐고, 나는 확실히 범인인 모양이었다.
처음 대전 둔산에 이사올 때만 해도 한가하던 주차장이 지하주차장 같은 경우에는 통로 양쪽에 차를 일렬로 주차할 만큼 차들이 늘어났다. 하기야 우리도 딸아이가 멀리 떨어진 학교에 다니자 차를 한 대 더 늘렸지만. 그러니 잘못 지하로 들어섰다가 빈자리가 없으면 살살 뒷걸음질 쳐서 일자 통로를 지나고, 그리고 나선형 램프를 올라와야 했다. 그렇게 등에 땀을 적시며 빠져 나온 적이 몇 번 있었다.
게다가 아내는 남편의 음주운전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요즘이야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하면 '무식'한 놈이 되지만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담배 피우는 아버지 옆에서 온 가족이 오순도순 모여 TV를 봤었다. 그때는 만취 상태가 아니면 모두 조심조심 차를 끌고 갔고, 심한 경우에는 다음날 차를 집에 갖고 왔는지, 직장에 두고 왔는지 그것조차 생각이 안 날 때도 있었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건 그 시절의 음주운전을 변명해서가 아니라 '그때'는 그렇게 우리의 수준이, 분명하게는 나의 수준이 상당히 '무식'했다는 고백을 하고 싶어서이다. 만일 음주한 상태였다면 내가 긁고서도 모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양반이 아닌데..."
경비아저씨는 계속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얼마 전에 출근길을 서두르다 일렬 주차한 앞차의 범퍼를 받은 적이 있었다. 차도 상당히 낡아 과거와 현재의 흔적이 뒤섞여 있었지만 난 앞차의 유리창에 메모를 남기고, 경비 아저씨한테도 자수(?)를 했었다. 그때 아저씨는 현장을 둘러보더니 뭐, 표도 안 나네, 했지만 난 그래도 받은 건 받은 거니까요, 했었다. 다행히 처음엔 흥분하던 차주인도 두 번째 통화에서는 어휴 뭐, 그런 것 갖고 돈을 받겠어요, 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다른 것 같았다. 긁은 흔적은 작았지만 교장 선생님은 핏대를 세우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기웃거리고 있는 주민들도 보였다. 어허, 어찌 이런 일이... 도무지 기억이 안 난다는 게 교장 선생님한테 통할 리가 없었다. 아내가 열악한 주차환경을 탓하며 사태를 무마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집게손가락보다도 작은 자국으로 범퍼를 바꿀 심산인 것 같았다. 왜? 손가락에 타박상을 입으면 팔 하나를 바꿔 보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담배를 피워 물었을 것 같다. 그러나 어쩌는가? 우리차가 긁었다는데...
바로 그때 그리도 눈썰미가 없는 내 눈에 흔적들의 위치가 들어 왔다. 나는 나뭇가지를 하나 주워 와서 우리 차 자국 높이에서 표시를 하고 청회색 차로 갔다. 아내, 교장 선생님, 그리고 경비아저씨까지 결코 우호적이라고 할 수 없는 시선들을 홀로 감당하며 청회색 바탕에 묻어 있는 은회색 자국에 나뭇가지를 갖다 댔다. 우리차가 바닥에서 점프를 하지 않는 이상 도저히 생길 수 없는 높이였다. 갑자기 물리학을 전공한 보람이 느껴졌다.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있겠는가? 비록, 기억하지 못하는 원인이 있었을까, 하고 내심 걱정하기도 했지만. 아내가 다시 사태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론 좀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내가 그럴 양반이 아니라고 했잖아."
나보다도, 아내보다도, 밝은 경비아저씨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뭉클할 정도였다. 이러니 약속과는 달리 재출마를 선언하는 정치인을 어떻게 욕할 수 있을까?
잠시 후에 교장선생님은 아내와 함께 집으로 사과를 하러 왔다. 갑자기 우리 세 사람은 좋은 이웃이 되었다. 이번에는 경비아저씨가 범인을 잡겠다고 그 나뭇가지를 들고 주차장을 뒤지고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인가 집에서 혼자 마음을 졸이고 있었던 딸아이도 아빠가 양심적인 사람이라는 당연한 소리에 너무도 좋아했다. 그럼, 누구 아빤데...
한동안 문 앞에서 그러고 있자니 앞집에서도 무슨 소리인가 해서 문을 열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조금 있자니 다시 문밖이 소란스러웠다. 아내가 문을 열고 나가보더니 무슨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는지 키득키득 하며 들어왔다. 여보, 범인이 바로 앞집이래.
그러고 보니 앞집차가 SUV였다. 그 차라면 그 높이에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아내는 뭣 때문에 우리가 억울한 소리를 들었는데, 그걸 알고도 모른 척 하다니 뭐 그런 인간들이 다 있냐고, 그 여교장은 높이도 다른 자국을 갖고 누구를 뺑소니 범 취급을 했냐고, 흥분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높이마저 비슷했으면 어쩔 뻔했는가?
그런데... 그런 걱정이 드는 거였다. 저런 분이 교장 선생님인 학교에서 아이들이 합리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을까? 아이들이 목소리만 크지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는 거였다.
(2012 봄에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