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아파트의 고양이 (1) 본문
2009년 여름에 쓴 글입니다.
아파트의 고양이
(1)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린다. 10여 분이 지나도록 그만그만한 소리는 끊어지지 않는다. 이번엔 또 뭐냐, 짜증이 난다. 오후 내내 참아줬고 저녁에는 참다가 직접 갔다 왔는데, 이번에는 또 뭐냔 말이다. 잠시 노트북에서 눈을 떼고 소파에 기댔다. 간혹 들리던 바로 그 소리. 크게 틀어 놓은 TV 소리인지, 남녀가 두런두런 나누는 말소리인지, 뭔지 분명치는 않지만. 오후와 저녁 내내 자료 정리만 하다가 시간이 지나버렸는데, 한밤중이 돼서도 이 모양이라니……. 얼굴이 점점 벌겋게 달아오른다.
소파 밑에 앉아 있던 나는 작성하던 제안서를 마우스로 긁적거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벽에 귀를 대고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소리를 쫓아갔다. 안방 쪽으로 갈수록 소리는 커졌다. 이번에는 바닥에 귀를 댔다. 벽이나 바닥이나 별 차이는 없었다. 지금 아랫집에는 내부 공사한다고 사람이 안 사는데…….
이 아파트로 이사 온 다음날 아침, 낮게 웅웅 울리는 소리에 나와 아내는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었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똑같은 시각에 똑같은 고전음악이 울려 퍼졌다. 견디다 못한 아내는 아랫집으로 내려갔고, 더워서 방바닥에서 뒹굴던 나는 갑자기 음악소리가 작아지고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걸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잠시 후에 아내가, 자기네는 음악을 크게 듣는 그런 무식한 사람들이 아니라네, 하며 옆에 누웠다.
우리가 아랫집이 음원이라고 생각했던 소리는 모두 네 가지였다. 고전음악, 찬송가, 작은 피아노 소리 그리고 지금 들리는 바로 이 소리. 하지만 마지막 소리는 아랫집의 것이 아닌 게 분명했다. 나는 의자 위에 올라서서 천장 가까이 귀를 대보고 다시 바닥에 엎드려 소리를 들었다.
“뭐야, 이놈의 아파트!”
자정이 넘은 탓에 생각만큼 크게 지를 수도 없었다. ‘뭔 놈의 아파트가 관처럼 울리나? 바다 모래를 사용했다고 하더니만……. 아까는 말이 통하는 것 같더니 12시가 넘어서도 이러면 어쩌겠다는 거야?’
목덜미를 따라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속옷이 젖어 들었다. 그래도 용케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예산을 손질하려던 나를 벌떡 일어나게 한 건, 다용도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진한 담배 냄새였다. ‘아래 아랫집에서 피우는 담배 연기가 한 층 걸러 여기까지 올 수도 있나?’ 20년 넘는 아파트 생활에 이런 곳은 처음이었다. 창가에서 몇 번 잔기침을 했다. 담배를 피우는 나도 남의 것은 싫었다. 어두운 바깥을 보다가 인터폰을 보았다.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가, 할 수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그때까지 웅성거림도, 담배 냄새도 여전히 집안에 음험하게 머물러 있었다.
*
1시간 정도 조용하더니 그가 다시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일어섰다가 앉았다가 의자에 올라섰다가 바닥에 엎드렸다가, 가만있으면 견딜 만할 텐데……. 몇 번이나 여길 봤다 저길 봤다 하더니 드디어 문을 열고 나간다. 그가 갑자기 불안해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세상은 별로 바뀐 게 없는데.
북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끔찍한 냄새를 맡으려니 오래된 일이 하나 떠오른다. 어린 내가, 뭐 이리 괴이한 냄새가 다 있는가, 하고 들숨을 가늘게 하여 입안에서 탐색하고 있으려니까 그녀의 남편은 내가 그 냄새를 좋아하는 줄 알았나보다. 다가오더니만 담배 연기를 내 얼굴에 한가득 끼얹었다. 좌우간 무례한 인간들이란…….
증조부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다. 인간이란 종(種)을 함부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우리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었는데 이솝 우화를 들으면서 깨우친 바가 컸다. 인간을 믿기 어려운 건 바로 그 숨의 이중성 때문이다. 음식을 식히기도 하고 언 손을 녹이기도 하는 그 이중적인 숨으로 연명을 하니까. 증조부님께서는 그걸 깨닫는 데에 목숨을 바치셨다. 당신께서는 나무도 몇 그루 있는 단독 주택에 사셨는데, 어느 날 보니 자기한테 일언반구의 알림도 없이 모두 집안을 텅 비워놓고 평소에는 잘 가지도 않는 지하실에 모여서 뭔가 심각하게 의논을 하더니만, 몇 달 후에 당신을 큰 가방에 넣어서 납치를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도 목이 졸리는 순간에 증조부님은 용케 탈출하셔서 오늘의 우리 집안을 열어 놓으셨다.
아직도 그는 문 앞에서 발소리를 죽인 채 서성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