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L부장의 영혼 (2) 본문

글/단편소설

L부장의 영혼 (2)

조용한 3류 2014. 12. 28. 13:16

(2)


3월에 소장이 바뀐 이후로 L부장은 정신이 없었다. 10년 넘게 아무 걱정 없이 계속되던 A부의 연구사업이 갑자기 종료되자, 다른 연구단들은 별로 자기들에게 보탬 되는 것도 없이 기초연구를 한다고 편하게 논문만 써대는 A부를 흔들고 싶었다. 특히 자신은 일 년에 백 편도 넘는 논문을 쓴다며, 툭하면 다른 연구단을 무식한 기술자 집단으로 취급하는 L부장을 이 기회에 확실하게 문질러 주고 싶었다. 반대로 연구비를 내부에서 지원받아야만 하는 L부장으로서는 어떡하든 그들의 마음을 돌려놔야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 폐지된다는 말조차 있던 A부가 단으로 커진다는 것은, 그에게는 그토록 자존심 상하던 부장이란 호칭 대신 단장이란 직함을 이름 뒤에 떡 하니 붙일 기회이기도 했다.


신임 소장은 각 부서별로 현황과 계획을 보고 받기 시작했다. A부는 맨 마지막 차례였다. 팀장들은 취미 활동한다는 남들의 불평을 의식해서, A부는 한가로이 논문만 써대는 부서가 아니라 미래 시장을 주도할 핵심기술을 미리 연구하고 있으며 다른 단에도 기술이전을 통해 도움을 줄 거라는 식으로 방향잡기를 권했으나, 처음에 솔깃하던 L부장은 몇 차례 회의를 거듭하더니, A부는 그 멍청이 같은 다른 단 사람들은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신기한 기술들만 연구해왔고 지난 10년 동안 세계 최초․ 최고의 논문들만 써왔다는 식으로 급선회했다. 좋게 말하면 자기 일관성이었는데, L부장은 목장을 뒤로 하고 건곤일척의 승부를 나서는 서부의 총잡이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그가 그런 이유로 정신이 없자 A부 사람들은 끔찍해졌다. 각자 해당 분야의 연구 실적과 계획을 제시했지만 미리 해보는 내부 발표에서 번번이 욕을 먹었다. 몇 차례 곤욕을 치르면서 사람들은 슬슬 깨닫기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외국 유명 학술지 특집호에 나온 사진, 개발완료까지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예상결과물의 몇 억 배 확대 모형, 다른 나라를 밀어내고 우리나라를 G7 국가로 밀어 올릴 경제적 파급효과 등등, 사람들은 미래의 '세계최초․ 최고'가 아니면 말을 시작하지 않았고 그는 '초일류'쯤 되어야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1차 결과는 참담했다. L부장이 부원들을 한 달 동안 닦달하며 만든 자료를 가지고 막 발표를 시작하자 소장은 툭하니 한마디를 던졌다.


“L부장, 그런 계획 말고 실적을 얘기해봐.”


그가 논문, 특허 숫자를 나열하려고 하자 소장은 한마디를 더함으로써 회의를 끝냈다.


“아니. 그런 숫자는 나한테도 있어. 그런 것 말고, 한 10년 됐으니 활용 사례가 있을 것 아냐? 기술이전이라든가. 준비 안 됐으면 다음에 하자고.”


그는 한 달 준비하고 5분 발표했다. 


이런 소식이 눈치 빠른 몇몇을 통해 A부에 퍼지자 사람들은 다가오는 암울한 구름에 차라리 희망퇴직을 신청할까, 라며 구시렁거렸지만 당장 그날 오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정작 L부장이 자기 방으로 A부 사람들을 모두 불러 여름 논의 벼처럼 세운 건 다음날 아침이었다.


“4월이 되니 봄기운이 완연합니다. 출근길에 보니 벚꽃이 피어 있더군요. 내가 이 좋은 봄을 몰랐구나, 어젯밤에 그런 생각으로 흥분이 돼서 잠을 이룰 수 없었어요. 이박사, 이박사는 어제 잠이 오던가?”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야기의 의도를 짐작할 수도 없었지만, 일단은 흥미로운 척 웃으며 차라리 이런 뜬금없는 얘기가 계속되길 바랐다.


“이박사도, 다른 사람들도, 너무 연구만 하지 말고 봄을 느껴 봐요. 알았죠?”


한 쪽 구석에 서있던 윤석우는 입소 후에 처음 L부장의 설교를 들었을 때, A부 사람들은 어찌하다 석․박사까지 했는지는 모르지만 전공지식 외에는 이순신 장군만 겨우 아는 빙충이들로 취급받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부 전체회의가 거듭될수록 어쩌면 모두가 진짜 빙충이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들어갔다. 그 사이 L부장은 이미 문학청년이 되어 있었다.


“파우스트, 여러분 파우스트 읽어봤어요? 이박사, 누가 썼지?”


딴 생각을 하느라 미처 질문을 듣지 못한 이박사가 주춤거리고 있을 때, 어차피 모를 무지한 한 명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구석에 가려져 있던 윤석우를 찾아내서 물었다. 그가 찬찬히 괴테, 라고 대답하자 L부장은 오?, 하며 자기 딴에는 멋있게 두 눈을 크게 뜨고 두 손을 모아 턱을 괴었다. 


“대학자 파우스트는 평생 이룬 학문에 회의를 느낍니다. 어리석은 멍청이들이야 눈앞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리겠지요.”


윤석우는 잠시 곤욕을 치른 후에 몸을 슬몃 움직여 L부장과 사각(死角)을 만들고는 오늘따라 유난히 나른한 봄볕을 즐기려고 했다. 50대 초반의 L부장은 인간의 한계를 느낀 대학자만이 알 수 있다는 표정으로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악마는 파우스트 박사를 마법 외투로 싸고 벌판, 데썰리트한 벌판, 음…… 다들 데썰리트 알아요?”


L부장은 뱀 같은 눈으로 사람들을 훑어보다 좀 전에 놓쳤던 먹이를 다시 보았다.


“음, 윤박사. 데썰리트가 뭐지?”

“……황량한……”

“오? 스펠링은?”

“……d  e  s  o…… late”

“오?”


L부장은 3분 쯤 더 얘기하다가 두 시간을 채워 그만의 독특한 회의를 끝냈다.


사람들은 비상계단에 마련된 흡연실에서 이러쿵저러쿵 회의 내용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제 소장한테 엄청 깨져서 아침에 그랬구먼. 이제 한동안은 파우스트만 듣겠네.”

“근데 왜 깨진 얘기는 안 하고 딴 얘기만 하시지요?”

“아, 누가 신입 직원 아니랄까봐. 우리 부장님은 셰익스피어 아니면 괴테야. 그런 것만 읽는 분이 어떻게 직접 깨진 얘기를 하겠어? 품위 없게.”


그러자 숨어 있던 작은 진실이 뒤에서 툭 튀어나왔다.


“그게 아니고, 오늘 아침 지각 단속에 우리 부에서 한 명 걸렸다는 거야. 자기 입으로 차마 말은 못하고. 제 발로 와서 사죄하라고 2시간 동안 외곽을 때린 거지. 이제 소장한테 또 당할 걸 생각하니 정상일 수가 없지. 그 양반 딴에는 품위 있는 방식인데…….”

“참, 김박사는 별걸 다 아시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나저나 우리 윤박사를 왜 그렇게 못 살게 굴지?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는 그렇게 친절하더니만.”


지원팀장은 창밖을 멍하니 보면서 담배만 태우고 있는 윤석우를 가볍게 한 번 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음, A부도 한 명 있구먼.” 소장의 그냥 지나치는 말에 철렁 내려앉은 L부장의 가슴은 다음 주에 A부 발표를 듣겠다는 말에 끝없이 답답했다. 그는 방에 돌아와서도 창가에서 멍하니 바깥만 바라보고 있었다. 한창인 벚꽃 아래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지나가는 젊은 여직원들이 오늘따라 그렇게 밉게 보일 수가 없었다. ‘지금이 어느 땐데…….’ L부장은 한없이 철없기만 한 세상을 탓하며 돌아보는데, 소파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것도 다리를 꼬아 탁자에 올려놓은 채. 그는 가까스로,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있었다.


“아니, 윤박사. 언제 들어왔지? ……그리고 누가 앉으라고 그랬어?”


가시 돋친 질문에 윤석우는 대답 대신 천천히 일어나서 창가로 걸어갔다.


“존경하옵는 L부장님, 오늘따라 벚꽃이 유난히 화사하옵니다. 같이 보시지요.”


부장이란 호칭을 끔찍이 싫어하던 L부장은 자신을 L박사님이나 L님으로 부르라고 했지만, 아무리 하라는 대로 하는 A부에서도 아직까지 L님으로 부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L부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그가 대체 뭘 믿고 자기가 혐오하는 호칭에다가 정중한 양 빈정대며 말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잘못하면 생전 처음으로, L부장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몰상식한 말이지만, 그에게 ‘자식’이나 ‘놈’이란 단어를 건넬지 몰랐다. 그런 L부장이 다시 창가로 와서 내려다보았을 때, 벚나무 아래 벤치 옆에서 사람들과 담배를 피우고 있는 윤석우가 보였다. L부장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아래를 한 번, 다시 머리를 흔들고는 옆을 한 번 보았다. 이러기를 한 번 더하면서,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여태까지 한 번도 겪은 적이 없는 눈빛이라는 느낌이 들면서 L부장은 가슴이 답답하고 열이 올라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속으로 기도를 했다.


“당신은 항상 입으로만 신을 찾는군.”

“윤, 윤……박사, 아니, 넌…… 넌 누구지?”


한참을 있다 겨우 나온 건 바로 옆에서도 들릴까 말까 한 작은 소리였다.


“나? 글쎄. 요새 열심히 읽고 있더구먼.”

“뭐? ……그럼 네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라고?”


놀란 나머지 뒤틀어지기까지 한 L부장의 얼굴을 그는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니. 그 급은 아니고. 자네가 파우스트 급은 아니잖아?”


L부장은 서둘러 책상 위에 놓아둔 성경을 찾았다.


“하지 마. 입으로만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아무 효과가 없어.”


자신을 시펨이라고 소개한 그는 내가 좀 도와줄까, 라며 탁자 위에 올려놓은 왼발을 까딱거렸다. 눈을 지끈 감고 있는 L부장의 귀에, 소장이 뭐라 하면 무조건 달라붙어, 라는 소리가 들렸다.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던 L부장의 눈을 뜨게 한 건 비서의 인터폰 소리였다. “L박사님, 소장님 전화입니다.” 소장은 L부장에게 관계와 학계에 두루두루 발이 넓은 최교수를 만나보라고 했다. 물론, 시펨의 말이 없었어도 예, 하고 쏜살같이 달려들 그였지만.


L부장이 최교수와 통화한 후에 팩스로 받은 것은 일본 잡지에 실린 ‘미래 우주통신’이라는 제목의 한 장짜리 기사였다. 일본에서 유학한 직원에게 번역시킨 바로는, 가까운 별까지 빛의 속도로 간다 해도 적어도 수 년 내지 수십 년 걸리는 우주에서 기존의 수단으로 통신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새로운 통신 수단으로 빛의 속도보다 10의 몇 승 배나 빠른 N파를 이용하자는,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이미 극비리에 실험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이었다.


그가 이 얘기를 회의에서 얼핏 꺼냈을 때, 팀장들의 반응은 한마디로 어이없다는 것이었다. 특히 그가 아끼는 이박사는 “공대 출신들 중에는 이론을 괜히 있는 걸로 보는 이들이 있는데…….”로 시작해서 비과학적인 태도에 대해 맹폭을 가했다.


“영구기관은 불가능하다고 열역학에서 아무리 말을 해도 아직도 영구기관에 관한 특허 출원이 계속 된다고 합니다. 빛보다 빠른 것을 통신 수단으로 이용할 수는 없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갑자기 그런 놈을 발생시킬 수 있는 시커먼 상자가 나타날 수 있다고 믿는 거죠. 그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이박사, 나도 알아. 설마 내가 그런 말을 믿겠어?”


L부장은 더 이상 말을 못 하게 했고, 이박사와 나머지 팀장들도 그가 공대출신이란 걸 뒤늦게 떠올리고는 슬며시 말끝을 내렸다. 


그러나 L부장이 웬, 흰소리냐는 생각을 아예 하지 못하게 한 건 바로 소장이었다. 간단한 실적 대신 화려한 수사로 가득 찬 발표 자료를 그가 두 손으로 붙들고 있을 때 소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거야 다음에 들어도 되고. 근데 최교수 일은 좀 진척이 있나? 그 양반 얘기는 자잘한 기술보다 그런 근본적이고 파급효과가 지대할 기술을 연구하는 게 출연연의 임무가 아니냐는 거야.”


서둘러 기술동향을 파악하고 있다는 그의 말을 소장은 다시 한 번 제대로 꺾었다. 


“움직이라고. 앉아서 자료나 찾지 말고. 일단 최교수가 아는 건 다 알아내고 시작해야지. 안 그런가, L부장?”


L부장은 오후 내내 ‘미래 우주통신’을 만지작거렸지만 좋은 수가 나올 리 없었다. 자신을 무식한 기술자로 취급할까봐 팀장들에게 다시 말할 수도 없었다. 한숨을 푸욱 쉬며 고개를 쳐들던 그는 어느새 시펨이 소파에 앉아 있음을 알았다.


“휴우……, 당신 때문에 내 간이 하나도 안 남아 나겠어.”


L부장은 자신이 그를 깜박 잊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어릴 적 친구를 대하듯 아무 불편도 못 느낀다는 데에 적잖이 놀랐다. 


“흐흐. 품위 있는 L부장이 그런 표현도 쓰는구먼. 그래, N파는 잘 진행이 되고 있나?”

“당신이 귀띔을 해줬지만 내가 뭘 알아야 하지.”

“그래? 기사 중간쯤을 보라고. 뭐가 있지?”

“어디…… 음…… 응? 그럼 윤석우한테 부탁하란 말인가?”

“그쪽은 A부에서 그가 제일 전문가잖아?”


L부장은 갑자기 이자가 자기를 돕는 건지 방해하는 건지 혼란스러워졌다.


“뭐가 그리 궁금해? 파우스트만으론 대답이 안 되나 보지?”


그는 시펨의 말뜻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악마가 아무나 방문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그런데 하필이면 왜 그놈 모습으로 나타난 거지?”

“원래 우린 남 편한 걸 좋아하지 않으니까. 흐흐. 그런데 왜 그렇게 윤석우를 미워하나?”

“음…… 그놈은 처음부터 건방졌어.”

“면접에서 왜 유학을 안 갔냐고 물으니까, 가도 나아질 것 같지 않아서, 라고 대답했다고?”

“한둘이 아니지. 그놈은 내게 주먹을 불끈 쥐고 나갔어.”

“유럽 학회로 출장 간다고 들들 볶았잖아. 미국이 아닌 유럽 가서 뭐 배울 게 있냐고. 잔소리 실컷 듣고 방을 나가면서 손을 움켜쥔 거 말인가?”

“음…… 그 출장 건은 그가 스스로 취소한 거야.”

“그렇지. 팀장인 이박사를 볶아대니 윤석우가 취소했지. 자네는 화장실에서 확인까지 하더군. 윤박사, 왜 유럽 출장 취소했지?, 라고. 흐흐.”

“음…… 그놈은 내 덕에 연구사업이 됐건만 고마워하지도 않았어. 버릇없는 놈 같으니.”

“그래? 고맙다고 정중히 인사를 하던데? 흐흐. 자넨 딱 한 마디 하더군. 정말이야?, 라고. 그 흔한 수고했다는 말조차 않더군. 흐흐. 들어온 지 2년밖에 안된 애송이가 그 귀한 연구비를 따왔는데도 말이야.”

“그게 그놈이 실력이 있어서 됐나? A부가, 연구소가 뒤에서 받쳐주니 됐지.”

“뭐 어찌됐건 그건 관심 없고. 흐흐. 그래도 딱 한 번 윤석우한테 친절했던 적이 있지? 누구 주례 설 때였던가?”

“음…… 그놈이 결혼식 사회를 봤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

“거봐. 이익이 되면 영혼도 팔 수 있는 거라고. 그 고지식한 놈의 순수성을 자극해 봐. A부의 위기부터 시작해서 말이야. 흐흐. 내가 이런 얘기까지 다 해줘야 해?”






자신이 결재 올린 포스트 닥 채용 건을 L부장이 반송한 이후, 윤석우는 부장이 바뀌기만을 빌고 있었다. 만약 L부장이 단으로 확대되는 A부의 단장으로 눌러 앉는다면 그는 다른 단으로 옮길 결심을 이미 굳힌 상태였다. 과제를 시작한 지 벌써 넉 달이 지나가지만 L부장은 건마다 제동을 걸었고 회의석상에서는 그를 즐겨 물어뜯었다. 그런 L부장이 난데없이 황당한 기술 검토를 지시한 것이다.


“아니, 이걸 왜 윤박사보고 검토하라는 거야?”


총애를 받는 이박사가 보기에도 이번은 너무 심한 모양이었다.


“글쎄요. 결혼식 이후로 처음으로 제게 웃으며 말씀하시더군요.”

“……윤박사. 요새 소문이…… L부장이 그대로 유임된다는 쪽이야. L부장한테 더 이상 밉보이진 마. 어떻게 선정된 과제인데 성공을 시켜야지.”

“상황을 잘 아시잖아요? 이박사님이 다 승인을 해도 L부장이 거부하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걸. 포스트 닥 지원자가 지방대학 출신이라고 무조건 안 된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이박사는 “L부장은 왜 그렇게 윤박사를 미워할까…….” 라고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가 골탕 먹는 걸 지켜보는 것도 그리 괴로운 것만은 아닌 듯했다.


“이 N파는 팀장들도 말이 안 된다고 만류했는데 왜 또 야단이지?”


하마터면 자신들이 치렀을 고단함을 떠올리니 이박사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윤석우는 그런 그를 보다가 말을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특히 이박사님께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시더군요.”

“응? 근데 왜 다 얘기하는 거야?”

“뭐 큰일이라고 숨기겠습니까? 이미 다 아시는 일인데.”


윤석우는 자기 과제 때문에 속이 탔지만, 이 괴상망칙한 기술 검토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인터넷도 뒤지고 입자물리학을 전공한 분께 기술적 자문도 구하고 겨우겨우 문서를 작성하였다. L부장에게 보고만 하면 끝날 줄 알았던 일은, 설명을 하기 위한 방문에 동행해 달라는 요구로 이어졌고, 그는 끝내 백발에 고집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는 최교수 앞에서 N파는 이론적으로만 존재 가능성이 제시된 단계이며, N파가 감소하지 않고 모든 걸 통과할 수 있다는 말은 역으로 송․수신을 조절할 수 없다는 의미가 되며, 무엇보다도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것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위배되는 것으로서 설사 존재한다 해도 우리 세상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딴 세상의 일이라고 보고를 했다.


그런데 그가 혹시나 염려했던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상점에서는, 특히 암시장으로 갈수록 전시된 물건만 파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겠지. 그런 극비 실험 내용이 공개되겠어?”

“예? ……핵폭탄 만드는 기술은 극비일지라도 이론적 기반이 된 상대성 원리는 훨씬 전부터 널리 알려졌습니다.”

“러시아로 출장을 가서 찾아보는 것도 좋겠지.”

“인용 문헌도 그 동네에서만 회람되는 저널입니다. 물론 저널의 실체도 의심스럽고요.”

“음……. 어느 교수가 내게 말했어. 자기 제자가 러시아에 가서 그 얘길 직접 들었고 N파를 만드는 기계도 봤다고.”


그랬다. 바로 이것이 유력 인사 최교수가 하고픈 조언의 실체였다. 흔히 이런 경우에 다음 단계는 이런 기술이 필요하다고 밑에서 요구하면 연구 예산이 내려갈 수 있도록 힘써 주겠다, 라는 식이었다. 당연히 그날 L부장은 서둘러서 윤석우와 그 제자를 만나러 갔고, 결국 그의 회사 사무실에 이미 놓여 있던 바로 그 N파 발생기마저 보고야 말았다.


“지난주에는 B기업에 가서 설명도 했습니다. 아직은 믿지 않으시겠지만 N파는 물체의 정보를 고스란히 옮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술과 물을 차례로 놓고 N파를 발생시키면 잠시 후에 물에 술맛이 납니다. 직원들한테 먹여 보니 정말 취하는 거예요.”

“알코올 함량 같은 건 측정해 보셨나요?”

“그래서 최교수님께 부탁을 했던 겁니다. 여긴 본격적으로 연구할 여건이 안 되어 있으니까요. L부장님, N파는 미래 과학 혁명을 이끌 겁니다.”


그는 윤석우의 어떤 질문에도 L부장과 눈을 맞추면서 답변을 했다. 그에게서 복사한 자료를 받아 나오는데 복도의 벽에 붙은 N파 관련한 투자 설명회 사진들이 보였다. 그는 윤석우의 눈치를 슬쩍 보더니 관심 있는 분들이 많아 자신이 듣고 본 걸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했었다며 가늘게 뜬 눈으로 웃음을 흘렸다.


최교수와 그 제자 앞에서 근사한 인사말 외에는 좀체 입을 열지 않던 L부장은 모두 퇴근한 후에 부장실에만 불을 밝혀 놓고, 아무에게도 꺼낸 적 없는 가슴 속 깊은 얘기를 하듯 간절한 어조로 윤석우에게 말했다.


“윤박사, 지금 우리 부의 현안을 해결하려면 그 분을 무시할 수 없어요. 기초연구가 중단되면 안 되잖아? 이제 단으로 확대되면 정말 제대로 할 수 있을 거야. 윤박사가 고생한 것도 다 훈련과정이었다고 생각해 주면 좋겠어요. 지금 모두가 기초연구를, A부를 살리기 위해,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애쓸 때잖아?”


당장 돈 안 되는 기술을 연구한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윤석우가 L부장에 대해, A부에 대해 갖고 있던 불만은 달을 본다고 발밑의 6펜스를 무시한다는 게 아니었다. 달을 본다고 했으면 날아오르다 떨어질지언정 달을 봐야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다가 나중에는 지문을 들여다보고 결국 손가락 장난까지 하고 마는, 바로 그런 점이었다. 학교나 기업에서 하기 힘든 부분을 하기 위해 정부에서 일부러 만든 곳이 출연연이라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윤석우였다.


지금 그를 괴롭히는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남들처럼 정문에 줄서지 않고 옆문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어디론가 전화 거는 행위를 그가 돕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이 혼자 밤새도록 정문에서 긴 줄을 설 때, 애쓴다는 말 한마디 않던 L부장이나 벤치에 둘러앉아 음료를 즐기던 그들을 위해서라니. 나머지 하나는 ‘과학기술’ 덕택으로, 그것도 남들보다 더 오래 더 많이 먹고 살아온 자들이 다른 욕심에 눈이 어두워 최소한의 과학적 태도마저 저버렸다는 것이다.


그가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L부장은 튼실한 턱을 가진 하이에나처럼 물고 늘어졌다. 그게 다 미루던 실적 발표를 한 후에 소장에게 들은 말 한 마디 때문이었다.


“L부장, 내가 그깟 돈 몇 푼 벌어오라고 실적을 물어 본 줄 알아? 퀄컴같이 해보자고. 상용화는 우리나라에서 시키고 로얄티는 걔들이 받아가잖아. 원천기술을 우리도 확보하자는 거야. L부장! 크게, 크게 생각해. 최교수 얘기도 그런 거 아닌가?”


며칠 만에 다시 서울로 떠밀려 올라간 윤석우는 N파를 발생시킨다는, 러시아 기술자가 국내에 들어와 직접 조립했다는 수천만 원짜리 장비를 검증하는 것으로 목표를 확정했다. 그런데 무슨 수로 검증을 하랴, 빛보다 빠르고 모든 것을 투과한다는데. 어쨌든 그는 서울에서 N파 발생기를 들고 내려온 다음 날, 몰래 A부 실험실의 한 구석에서 한 변이 50cm 정도 되는 정육면체 형태의 시커먼 상자를 열어 보았다. 학부과정 실험에서나 보았을 큰 코일 그리고 땜질로 봉합된, 두 개의 원뿔을 맞붙여 놓은 것 같은 물체뿐. 조용히 부른 전자공학 전공자는 “어? 뭐 이런 게 있나? 이건 선이 연결도 안 됐네.” 라고 어이없어 했다. 윤석우가 그 봉합 안에 무엇이 들었냐고 그 제자한테 전화를 걸었을 때 들은 답은 “러시아 기술자가 우리 회사에서 조립할 때 모두 나가게 하고 혼자 했어요. 그 부분이 바로 핵심입니다.” 였다. 이런 희한한 일이 진행되는 동안 L부장은 코끝도 비치지 않았지만, 시커먼 상자만은 퇴근할 때 가능한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들고 와서 부장실에 보관하게 했다. 5월 말에는 A부는 단으로 확대되고 L부장은 단장으로 승진한다는 소문이 거의 정설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윤석우는 늦게 야근까지 하면서 숙고를 했다. ‘……그래, 이럴 때는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게 낫다. 그냥 실험을 하고, 그냥 나온 대로 보고서를 쓰자. 어차피 L부장이 있는 한, 나는 A부에 있을 수 없다.’ 그는 가까운 10명을 골라 메일을 보냈다.


‘……이유는 묻지 마시고 우리 부를 위한 일이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20잔의 물을 드시고 맛을 척도에 따라 평가해 주시면 됩니다. 따라서 실험 1시간 전부터는 물을 드시지 마십시오. ……그러면 아래 순서에 따라 다음 주 화요일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날 밤 그는 오랜만에 편히 잠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