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봄꽃이 늘 그렇듯 (5) 본문
별로 생각이 없었는데 벽제까지 따라 오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이편이 아닌 저편에 있습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이편이지만). 근데 참, 이상합니다. 사람들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합니다, 여기는 화장장인데……. 개신교와 천주교의 찬송이 들립니다. 가까운 이를 보내는 소리들이 경쟁하듯이 점점 커져 갑니다. 산 자의 식으로 죽은 자를 보내나 봅니다.
아내는 그전처럼 한 번 앉지도 않고 아미타불을 염송하고 있습니다. 제 몸이었던 것이 타고 있나봅니다. 이제……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아내의 어깨를 가볍게 만졌습니다. 아내가 염불을 하다가 흠칫합니다. 다시 한 번 간절히 부탁합니다. 정말, 남의 일처럼 살아가라고. 그것밖에 해줄 말이 없습니다.
이제야 모든 게, 기억조차 희미하거나 혹은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일까지 눈앞을 지나갑니다. 남의 일같이, 그렇게들 지나갑니다. 이윽고 모든 것이 지나가고, 검은 옷에 백옥빛 유골함을 안은 저만 남았습니다. 어둡던 세상이 점점 환해집니다. 포근한 바람, 부드러운 햇살…… 제 키만큼 쑤욱 자란 누런 억새밭이 강같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저는 억새밭 사이를 햇살에 졸며, 바람에 밀려 한없이 걸어갑니다, 한없이…….
저 멀리, 황금빛 환한 언덕에 아이가 하나 보입니다. 머리를 한 갈래로 묶고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가 보입니다. 계집아이는 하늘하늘한 모습으로 손을 흔듭니다. 저는 눈도 없건만 뜨거운 눈물을 훔치며 미친 듯 달려갑니다. 드디어, 사랑하는 딸아이를 안습니다. 아니…… 안으려다가 멈춥니다. 잘 있었냐고 묻지도 못하고, 너무 보고 싶었다는 말도 못 하고, 그냥, 그렇게 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눈을 감습니다.
이제, 정말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냐고요? 글쎄요. 언젠가는 제 입장이 될 텐데요, 허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