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L부장의 영혼 (1) 본문

글/단편소설

L부장의 영혼 (1)

조용한 3류 2014. 12. 28. 13:11

- 2008년 늦가을에 쓴 글입니다.

 

- 문득 읽어봤다. 내가 미쳤는지 모르지만, 아깝다, 이대로 묻혀버리기엔. 인간 문명의 유무형 자산뿐만 아니라 이런 평범한 인간들의 감정들도 인류 공용의, 공유의 자산 아닐까? (2023. 3. 31)

 


 

L부장의 영혼

 

 

(1)

 

L부장은 여느 때처럼 엘리베이터를 제쳐 두고 옆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오! 이박사. 파우스트 읽고 있어?”

 

두 달 전의 전체회의가 끝난 후로 그는 친근한 인사를 이 말로 대신하곤 했다. 옆으로 물러선 이박사는 주춤거리며 쾌하게 답을 하지 못했지만, 그는 총애하는 부하 직원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5층으로 계속 걸어 올라갔다. 월요일 아침, 부장실로 가는 길에 만난 직원들은 한결같이 주춤, 멈칫거렸다. 그가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무려 1시간이나 지나서, 10시에 있는 직할부서장 회의에 참석하려고 일어설 때였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사업지원팀장이 그가 보직 해임된 사실을 알려줬다. L부장은 한참이나 뜸을 들이다가 가까스로 물을 수 있었다.

 

“언제 발령이 났지요? 주말에 소장님과 같이 식사할 때도 나는 아무 얘기를 못 들었는데…….”

“어제 일요일 오후에 발령이 난 모양입니다. 요샌 인트라넷을 통해 다 진행이 되니까요. 안 보신 것 같아서 제가…….”

 

그가 직접 모니터에서 발령을 확인하는 동안 지원팀장은 이 답답한 척하는 양반에게 앞으로 할 일을 어떻게 말해줘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L부장 건으로 인해 오전 내내 A부의 그 누구도 제대로 일을 손에 붙이고 있질 못했다. 연구소 전체가 태풍이 다가오는 대숲처럼 술렁거리는데다 A부는 단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더 많은 변화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IMF 구제금융을 신청한 여파는 안 좋을 때면 꼭 공무원 대우를 받는 출연연구소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연구비 삭감부터 시작해서 명예퇴직, 희망퇴직 얘기까지 나오고 있었다. 아직까지 직원들이 소문으로만 어렴풋이 듣고 있었을 때, 이미 L부장은 지난주에 제출한 퇴직자 명단에 그의 경쟁자를 적어 넣음으로써 그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L부장은 오전 내내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총애를 받던 몇 사람들도 그가 성경만 줄곧 들여다보고 있다는 비서의 얘기를 들었을 뿐 감히 문을 열고 들어갈 생각을 하지 못했고, 그에게 신물이 났던 사람들도 아직은 그들끼리만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방을 비울 생각을 않는 L부장 때문에 신임 단장은 부서장 회의를 다녀와서도 옛 자리와 지원실을 서성댈 수밖에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하루 내내 계속될 만큼 L부장은 A부에서 절대적이었다.

 

L부장은 방 한 쪽에 고이 모셔져 있는 시커먼 상자를 한참 바라보았다. 소장의 웃음 띤 얼굴도, ‘N파 연구보고서’가 기대된다던 최교수의 백발도 잠시 떠오르다가는 이내 산산조각이 났다. 이렇듯 그가 점심도 거른 채 하루 종일 성경책만 바라보다가 결국 짐을 챙기려고 일어날 때까지, 지원팀장과 이박사는 물론 지난 두 달 동안의 조언자도 그를 찾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