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아파트의 고양이 (2) 본문

글/단편소설

아파트의 고양이 (2)

조용한 3류 2014. 12. 28. 13:33

(2)


동네를 쩌렁쩌렁 울린 전기톱 소리와 뭔지 모를 그 텁텁한 냄새만 아니었다면, 계획했던 만큼 에어컨도 켜지 않고 일을 했을 것이다. 오후 내내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지만 새로운 내용을 추가하기는커녕 이미 있던 걸 다듬는 수준에서 맴돌고 있었다. 오늘 아침 아내의 예민함을 탓할 뻔했던 나도 집에 온 지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번잡한 사무실 때문에 조기 퇴근까지 하면서 일거리를 들고 온 자신을, 무엇보다도 집중력을 과신했던 자신을 몹시 원망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전기톱이 날카로운 굉음을 몇 번 울렸을 때만 해도 나는 찾아 놓은 숫자를 보기 좋게 그래프로 그리고 있었다. 아직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기술이라 시장규모 대신 특허 출원 건수의 증가를 통해 해당 분야의 발전 상태를 보여 주려는 의도였다. 몇 년 전에 IT-BT 융합 분야의 과제 평가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감염내과 전문의부터 데이터베이스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모였었다. 하나 재미있던 것은 아는 게 판이한 사람들의 평가 결과가 상당히 유사했다는 것이다. 특히 높은 평가를 받은 과제일수록 그랬는데, 제안자가 전체를 꿰고 있으면 모르는 이들을 속속들이 이해시키지는 못하더라도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는 있다는 것일까? 그런데 평범한 사람들이 시험 전날에 늘 그렇듯, 공부 빼곤 모든 일에 샘솟는 의욕을 정리해서 가까스로 마음을 잡고 나면, 어김없이 집에 일이 생기거나 정히 없으면 정전이라도 되는 법이었다.


굉음 속에서 그래프를 그려 본문에 붙여 넣었을 때, 바로 앉은 자리 밑에서 깜짝 놀랄 틈도 주지 않고 망치 소리가 위협적으로 울렸다. 그리고 마지막 일격처럼 먼지가 몹시 섞인 듯한 무더운 바람이 텁텁한 냄새를 물씬 풍기며 들어왔다. 그 텁텁함에 질식할 것 같던 나는 후다닥 일어나 창문을 모조리 닫고 에어컨을 켰다. 사무실 자리가 에어컨 근처에 위치한 탓에 때 아닌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약간 땀을 빼면서 작업하고 싶었던 소박한 꿈마저 여지없이 깨지고 만 것이다.


난 잠시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내일이 제출 마감일이라 오늘 다 끝내고 내일은 제본한 후에 J진흥원에 바로 제출할 요량이었다. 대부분의 작은 중소기업들은 당장 먹고 살 일에 바빠서 나라에서 연구비라도 지원받아야 그 핑계로 일정 분량의 연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연구라고 해 봤자, 실험실에서 새로운 현상을 탐구하는 게 아니라 다음 제품 개발에 바로 필요한, 반쯤은 알려지거나 이미 대부분 개발된 기술을 다루는 거지만. 사실 제안서를 작성하면서도 가장 부담스러웠던 부분은, 연구 내용을 줄이고 줄여 실행 가능할 것 같은 부분만 남겨 놓았는데도 과연 이것이 2년 내에 이뤄질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런 고민 때문에 이런저런 내용들은 확실하게 뿌리내리지 못하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지도 몰랐다.


아침부터 답답한 마음으로 유달리 빨리 가는 시간을 붙잡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사장은 벌써 오전에 두 번이나 나를 찾았다. 투자 유치와 관련한 손님들이었는데 별 필요도 없이 나를 불러 인사를 시키곤 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을 보낸 후에 나는 사장에게 냉방병 핑계를 대며 집에 가서 제안서를 작성해야겠다고 말했다. 때마침 아내 없이 혼자서 밤을 지낼 참에 잘 됐다 싶었는데, 어이없게도 처음부터 계획은 어긋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시원한 바람 아래서 깜박 졸던 나를 현실로 돌아오게 한 건 윗집 아이의 쿵쾅거리며 뛰는 소리였다. 뒤이어 쿵, 쿵, 쿵, 쿵 발뒤꿈치로 내딛는 소리가 천장을 울렸다. 며칠 전 지하주차장에서 구두 굽을 유난히 또각거리며 걸어오던 여자가 엘리베이터에서 한 층 위 버튼을 눌렀을 때, 그녀가 바로 윗집 소음의 주범 중 하나이며 그 걸음으로 보아 이미 고칠 수 있는 단계는 훌쩍 벗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보통 때는 엄마 옆에서 멀뚱멀뚱 눈만 껌벅이던 윗집 아이도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를 몸 안 깊숙이 어딘가에 숨겨 놓았는지, 주말에 부모만 외출하면 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좁은 우리 안의 다람쥐처럼 기를 쓰며 뛰곤 했다. 언젠가 우연히 만난 아내에게, 자기네 아이들은 조용히 공부만 하며 자신은 워낙 새같이 가벼운 몸이라 소리가 날 리 없다, 윗집이 무척 시끄러운데 그 소리가 한 층 걸러 거기까지 들리느냐, 라고 윗집 여자는 자기 집 소음에 대해 주저 없이 또박또박 얘기를 했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발소리가 지축을 울리는 걸, 문 닫는 소리가 “콰아앙”이라는 걸, 그리고 자기 자식이 아랫집의 인터폰 소리를 듣자마자 불 끄고 잠자는 척 할 수 있다는 걸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위-잉, 쾅, 쿵광, 그리고 쿵쿵쿵쿵……. 소리는 사방에서 조여 왔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노트북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난 소파의 삼베 방석 위에 누워서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이 집에 온 지 3개월 만에 처음으로 혼자만의 오후를 즐기려는데 그가 느닷없이 문을 열고 들어올 줄이야! 그는 나를 보자마자 반색을 하고 달려올 듯하더니만 곧 잠잠해졌다. 그는 분명 내게 우호적인데 항상 저런 식으로 주춤거리고 멈칫거린다.


나는 인간의 나이로 치면 30대 중반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와 통할 수 있는 세대이건만 자신들을 ‘주인’이라는 해괴망측한 단어로 표현하기를 좋아한다. 그가 식사 말고는 나의 대소사를 거의 챙기는 편인데, 우리가 까다로운 종족은 아닌 만큼 그리 힘들진 않을 것이다. 내가 모친과 헤어져 4년여의 세월을 보냈던 집은 정반대였다. 남자는 교양 없이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마구 비벼 고문을 하는 것 빼고는 일체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와 아이는 내게 무척 친절했다. 지금도 그 모녀가 먼 이국땅에서 아무 탈 없이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오기를 빈다. 솔직히 모녀가 그리울 때가 있다. 유난히 교교한 달빛 탓이기도 하지만…….


모녀는 남편이, 아빠가 내게 신경 쓸 리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닫고, 그들이 없을 동안 아이 친구 집에 나를 부탁한 모양이다. 그러면서 일언반구 내 의사를 묻지 않았다. 제발 학교에서는 아무 보탬도 안 되는 다른 인간들의 말을 가르치는 대신에 같이 사는 다른 종족들과 소통하는 법을 교육했으면 좋겠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들의 선생이 되어달라는 요청이 내게 올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귀찮은 일이지만 종족 간의 사랑을 위해 나 하나쯤 희생할 용의는 있다.


이 집에 대해서는 별로 불만이 없다. 그는 근본적으로 우리 종족에게 우호적이다. 그래도 기본은 갖춘 인간인 셈이다. 그의 아내는 이유 없이 나를 무서워한다. 내 생각에는 우리를 배은의 상징과 불길한 징조로 모함했던 악인들의 꾐에 넘어간 것 같다. 그래서 식사나 간식 등은 알뜰히 챙겨줘도 내게 다가오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나의 접근을 화들짝 놀래며 감히 거부하기도 한다. 딸아이는 제 엄마를 닮아 나와 접촉하는 걸 두려워했지만 다행이 아빠에게서 물려받은 유전자 덕으로 이젠 거의 스스럼없이 지내고 있다. 늦었지만 사랑스런 딸에게는 너무나 다행한 일이고, 한편으로 아이 교육에는 엄마, 아빠가 다 필요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그의 아내가 여기저기서 사다 모은 조그만 집들이 놓여 있는 선반 위에 누워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공사하는 아랫집에서 올라오는 소리와 냄새를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며칠 친정에 가 있겠다고 했고, 그는 아내의 예민함을 탓하려다가 딸아이의 웃는 얼굴을 보고는 좋은 아빠처럼 쾌하게 동의를 했다. 뭐, 며칠 남은 방학을 외가에서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나도 꼬리로 선반을 두어 번 쳐주었다. 그런데 곧 내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아이는 나와 같이 가고 싶어 했지만 외가에서 꺼릴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근처에 사는 이모 집에서 키우는 멍청한 강아지와 마주칠 수 있다는 것이다. 뭐, 좋다. 난 쓸데없이 나돌아 다니는 걸 좋아하는 멍청한 개가 아니라, 구원은 자신의 내부에서 온다는 걸 아는 현명한 고양이 종족이니까.


그나저나 오후 내내 그가 힘든 모양이다. 소리와 냄새에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그 둔한 인간이 이리 힘든데 나는 오죽하겠는가? 처음에 난 죽는 줄 알았다. 말로만 듣던 고문이 이런 건가 싶었다. 그런데 죽으란 법은 없다고, 가능한 몸을 바닥이나 벽에서 떼어 놓아 조금이나마 고통을 줄일 줄도 알게 됐다. (그래서 요즘 내가 이 삼베 방석에 집착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주 부도덕한 고양이를 빼고는 수선스러움을 경계하는 종족이다. 그나저나 인간들은 너무 시․청각에만 치우쳐 있다. 언제가 그가 읽던 반야심경에도 분명 ‘공중 안이비설신의(空中 眼耳鼻舌身意)’라고 오감의 중요성이 균등하게 설파되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인간들은 사랑을 나눌 때만 오감을 온전히 사용하는 불쌍한 신세가 돼버린 것 같다. 어쨌든 오후를 혼자 조용하게 지내려던 내 꿈은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그가 바쁘긴 바쁜 모양이다. 내가 앞발로 살짝 건드려도 응, 하고는 철천지원수를 만난 듯 노트북을 노려보고 있다. 근데, 왜 나는 이런 때일수록 인간과 소통하고 싶은 것일까? 이렇듯 바쁜 그를, 내게는 우호적인 그를 돕고 싶지만 불행히도 나는 인간의 언어를 전혀 모른다. 여태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쓴 것도 그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인데, 언어를 모른다면서 어떻게 말을 알아들었냐고 어리석은 질문을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예, Yes, Ja, 是라는 말은 모르지만 소리의 맛과 화자(話者)의 표정, 몸짓 등을 통해 그 뜻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며 겉으로만 ‘예’ 했을 때를 분별 못 하지만, 우리는 쉽게 진실을 알 수 있다.


이게 다 오감을 활용하는 전감(全感) 교육 때문이다. 수염으로 공기의 떨림을 듣고 입으로 공기의 냄새를 맡는 건 그 능력의 일부일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삼베 방석 위에 누웠다 해도 얼마나 시끄럽고 온 몸이 물리치료 받듯 떨리겠는가? 더구나 그가 에어컨을 켠 지금, 그 바람을 싫어하는 나는 삼베 방석을 떠나 소음과 진동으로 끔찍한 저 밑의 세상으로 내려가야 할지도 모른다. 아! 나는 괴롭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존재’도 좋지만 지금은 뭔가 해야 할 것 같다. 


그가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장식장으로 가려지는 구석에 삼베 방석을 놓아준다, 그것도 두 장이나. 나는 그의 제의를 쾌하게 받아들이며 야옹, 하고 웃어줬다. 그래도 상당한 이 떨림을 극복하기 위해 나는 사유를 즐기기로 했다. 어리석은 인간들로부터 게으르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지만, 우리는 끊임없이 사유하고, 눈을 감고 명상하고, 어쩌다 행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