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태기왕 (1) 본문
2012년 7월에 쓴 겁니다. 태기왕의 전설은 태기산의 서쪽(횡성군)과 동쪽(평창군)에 따라 다른데, 이 글에서는 평창군의 전설을 따랐습니다. (전설, 앞 포스팅 참조)
태기왕
(1)
태기왕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군사들을 만났을 때, 그만 눈앞이 아찔했었다. 어둠이 내리고부터 잠시도 쉬지 못했던 그의 병사들도 그만 끝인가 싶었다. 그러나 지옥문 앞에서 만난 이들은 태기군의 주력인 삼형제 장군 부대였다.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던 태기왕과 병사들은 구원군에 도움을 받아 동 틀 무렵에는 간신히 무이리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둠이 가시고 사방을 둘러보니 그들을 구해준 구원군 역시 겨우 이름뿐이었다.
태기국 군사들은 삼형제봉을 중심으로 회령봉과 태기산에 양 날개처럼 포진하고 있었다. 태기군의 비밀스런 움직임이 나무꾼들을 통해 드러났는지 적군의 세작이 눈에 띄었다는 보고가 하나둘 잇달아 올라오기 시작했다. 태기군은 동쪽의 도사리에 있는 적군이 그 날개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4년 전부터 이때만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적군은 정탐병을 보내 조금 더, 조금 더 깊게 찌르기만 할 뿐, 대규모 병력은 좀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정탐병이 나무꾼들의 소문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자 계속 무료하게 정탐만 해가는 것처럼. 이윽고 온 산이 붉고 누렇게 물들고 마침내 낙엽이 하나둘씩 떨어지자 기다림에 지친 태기군의 예기도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11월로 넘어가자 떨어지는 낙엽은 하루가 다르게 태기군이 숨을 곳을 줄였다. 그리고 해는 늦게 뜨고 일찍 떨어졌으며 드디어 그날은 달조차 빛을 거두는 합삭이었다. 그 칠흑 같던 밤이 시작되자마자 도사리에서 번개같이 내달은 적군은 한쪽 날개인 회령봉을 집어 삼킬 듯이 두들겨댔다. 태기왕은 호령장군이 피운 봉화를 보았지만 선뜻 아래로 달려가 돕기가 두려웠다. 저 암흑의 골짜기에 무엇이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가 화광이 충천한 회령봉을 발만 동동 구르며 바라보고 있을 때, 마침내 정탐병이 돌아왔다. 태기왕은 거의 숨이 넘어가는 그에게서 전황을 듣자마자 산성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라는 명령을 내리고 한편으론 삼형제봉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갈을 급히 보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태기국 군사들이 손발을 놀릴 새도 없이 적군은 산성을 에워싸며 밀려들었다. 오랫동안 준비해둔 화살과 돌 들을 퍼부었지만 어둠은 그 팔을 넓게 벌려 적들을 감싸는지 좀체 적군의 세력은 꺾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동안 탐색해둔 길을 하나씩 확인이라도 하듯 적군은 정확하게 한군데, 한군데씩 무너뜨리며 산성을 순식간에 점령해 왔다.
"호령장군은 어찌되었는가?"
태기왕의 물음에 서로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삼형제봉에는 우리 군사가 얼마나 남아 있는가?"
"여기 끌고 온 군사가 전부이옵니다. 태기군은 이게 다이옵니다."
태기군이 하룻밤 싸움에 이렇게 깨강정이 될 수가…… 태기왕은 벌렸던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러나 더욱 기가 찬 것은 그렇게 몇 마디 말을 나누지도 않았을 때, 산 위에서 쫓아 내려오는 적군이 눈앞에 보였다는 것이다. 삼형제 장군들이 죽을힘을 다해 적군과 맞서는 동안 병사들은 태기왕을 감싸고 다리에 불이 붙듯 뛰었다.
처음부터 적군은 태기군의 기대와는 달리 펼쳐진 날개 속으로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삼형제봉과 태기산에서 오는 길목들을 매복으로 차단한 채 죽으라고 회령봉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셋 중에 제일 작은 회령봉의 군세가 꺾이자마자 적군은 주력을 태기산으로 돌리고 다시 한 갈래를 떼어 오른쪽으로 우회해서 삼형제봉을 공격했다. 이미 멀리 떨어진 회령봉의 화광에 적의 군세가 호대함을 깨달은 삼형제 장군들은 회령봉보다는 태기왕이 있는 태기산성으로 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었다. 척후의 보고에 따르면 삼형제봉 쪽으로는 적군이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직접 원군을 이끌고 산길 소로를 달리고 있던 삼형제 장군들은 삼형제봉이 우회한 적군의 야습을 받고 있다는 보고에 기겁을 했다. 그곳에는 모든 군량미와 병기 그리고 태기국 병사들의 가족이 머물러 있었다. 삼형제 장군들의 가족은 물론 왕후와 왕족들이 있었던 것이다. 어찌할 바를 놓고 삼형제 장군들은 형제의 숫자만큼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왕의 구원이 먼저다. 아니다, 삼형제봉을 잃으면 우린 모든 근거가 사라진다, 좋다, 반씩 나누어 양쪽을 구원하자…… 하지만 삼형제봉을 구하러 갔던 막내도 멀리서 그들의 산채가 불타는 것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태기산으로 합류해야 했다. 그런 얘기를 막 주고받고 서로 눈물을 훔쳤을 때 또 다시 적군을 맞은 거였다.
태기군이 겨우 한 줄기 활로를 찾아 산을 내려왔을 때, 그동안 기다리고 있었음에 틀림없는 적군들이 다시 왼편에서 달려들었다. 태기군은 옆과 뒤 양쪽으로 쫓기면서 멀리 백옥포를 향해 다시 달려야 했다. 이미 11월의 찬 서리가 내린 들판 위로 태기군의 주검은 하나씩 하나씩 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