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태기왕 (3) 본문
(3)
주변 큰 나라들의 압력 속에서 태기국이 혼자 외로울 때, 나라에는 작은 변란이 있었다. 진한 출신의 신승이라는 자가 예와 내통하여 태기왕을 몰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역모에 대한 태기왕의 대처는 몹시 달랐다. 그는 간사한 신승을 놓아 주고, 뜻밖에도 그의 역모를 고변했던 자를 나라밖으로 내쫓았다. 왕은 말했다.
"어차피 내가 세상의 인심을 잃지 않은 바에는 모든 역모는 진압될 것이다. 만약 세상이 나를 원망하는 바가 있다면 나 역시 역모를 통해 배울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이 삼한의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 신승이 예와 내통한 증좌가 없는 이상, 그를 벌해서는 안 된다."
그랬기에 풀어준 신승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던 삼형제 장군들이 몰래 밤에 예로 도망치려는 신승을 잡아 그의 목을 한칼에 베려고 했을 때, 왕이 바람같이 나타나 비굴하게 손바닥을 비벼대는 그의 목숨을 한 번 더 구해주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백제와 진한과 달리 태기국을 채근하지 않았던 예에서 침략을 해왔다. 한동안 삼한에서 그렇게 큰 군사들이 동원된 적은 없었다. 그들은 마치 나라 구석구석을 미리 다 들여다보고 있었던 듯 태기국을 유린했다.
신승이 역모로 잡히던 밤에 호령은 그에게 물었었다.
"네 놈이 진한에서 넘어온 이후로 왕께서 그토록 우대를 했고, 네 놈 또한 주변 나라와 심지어 낙랑까지도 연결하는 가교가 되고자 노력하지 않았더냐? 그랬던 네 놈이 이리 모반을 꾀한 연유가 대체 무엇이더냐?"
신승은 입가에 두 가닥 수염이 난 쥐새끼 같은 몰골로 내내 목숨을 구걸하더니 풀려나자마자 간사히 웃으며 말했었다.
"차차 아시게 될 것이옵니다."
그 웃었던 연유가 예의 침공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신승은 여러 나라 세작들을 귀빈이란 이름으로 불러들이고 그들이 활개 치게끔 도왔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그와 예의 속내가 서로 맞아, 신승은 안에서 변란을 일으키고 예는 밖에서 쳐들어오기로 했던 거였다. 비록 신승의 역모는 사전에 드러났지만, 태기왕은 애써 덮어주었고, 그러자 예는 아예 노골적으로 본심을 드러낸 셈이었다.
예군에 맞섰던 삼형제 장군들의 연이은 패전 소식에 태기왕은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왕이 그 이유를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왕이 평화를 말하는데 밑에서 애써 군사를 조련할 리 없었다. 비록 왕은 평화를 지킬 힘을 누누이 강조했지만, 밑에서는 평화와 힘이라는 겉보기에 상반된 두 말을 같이 이해하기 힘들었다. 태기왕이 직접 창을 꼬나들고 선두에서 말을 달렸지만 전세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민가는 약탈되어 곡식 한 톨 없었고 부자들은 곡식을 내놓기는커녕 발 빠르게 예군을 영접했다. 왕은 연전연패한 끝에 마침내 도사리까지 쫓겨들었다. 태기국의 패잔병들이 그 소문을 듣고 모이자 왕은 나라의 운명을 건 마지막 싸움을 준비했다. 그 싸움을 위해 태기군은 며칠 만에 겨우 한 끼를 지어먹었다. 그리고 먼동이 틀 무렵, 나팔 소리와 함께 왕을 선두로, 태자와 삼형제 장군, 그리고 호령장군이 이끄는 태기군은 모두 목숨을 내걸고 치달렸다. 그들이 태어나고 자랐던 그 땅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