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태기왕 (4) 본문

글/단편소설

태기왕 (4)

조용한 3류 2015. 2. 4. 11:55

(4)


도사리 싸움 이후, 태기왕은 편하게 잠 든 적이 없었다. 그날 태기왕은 태자를 떠나보냈다. 하루 낮과 밤의 치열한 전투가 끝나던 저녁 무렵, 태기왕은 삼형제 장군이 겨우 구해온 태자를 품에 안았다.


"아바마마, 제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 눈의 화살을 뽑아주소서."


태자의 몸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바마마, 제 마음이 느낄 수 없습니다. 제 가슴의 화살을 뽑아주소서."


태자는 아비의 품에 안기자마자 고통스럽게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차가운 대지로 돌아갔다. 태기왕은 예의를 갖출 새도 없이 백옥포 푸른 물을 굽어보며 태자를 차가운 땅에 묻었다. 그러고는 다시 구차한 목숨을 구하러 달리고 또 달렸다.


이윽고 예군의 추격이 그친 곳에 다다랐다. 몸에 성한 곳이라곤 남아 있지 않은 병사들이 소문을 듣고 하나둘씩 다시 모여들었다. 태기왕은 바위에 앉아 먼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삼형제 장군들이 그들을 이끌고 태기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대왕이시여, 저는 자만심에 차서 제 자랑만 하고 다녔습니다."

"대왕이시여, 저는 항상 저와 제 집의 안위만을 걱정했습니다."

"대왕이시여, 저는 이 자리에 오른 것만으로도 만족했습니다."


왕은 아무 말 없이 먼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삼형제 장군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마지막으로 아뢰옵니다. 다시 시작해보자고. 간절히 아뢰옵니다. 다시 시작해보자고."


그러자 모든 병사들이 소리쳤다.


"태기국, 태기국, 태기국……."


몇 날 며칠 먼 하늘만 바라보았던 태기왕은 그렇게 또 하루를 더 보내고는 마침내 바위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예의 눈을 피해 태기산을 지나 어답산 북쪽 병지리에 머물렀다. 태기국 유민들이 사방에서 먹을 것, 입을 것을 몰래 보내왔다. 부자들 중에도 예군에게서 환영 받지 못한 자들은 몰래 양쪽에 다리를 놓기도 했다. 태기군은 피나는 훈련을 해갔다. 훈련 끝에는 왕과 병사가 흘러내리는 온천수에 함께 몸을 담그며 피로를 풀었다. 그들은 시간이 지나자 조심스럽게 병지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움직일 때는 무더운 녹음기를 택했고 나무가 앙상한 계절에는 깊은 골과 바위 틈으로 꽁꽁 숨었다. 마침 도사리에 주둔하던 예의 주력 부대가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했다. 삼한 아래에서 예와 진한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렇게 절호의 기회는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먼저 도사리에서 제일 가까운 회령봉에 경험이 많고 노련한 호령장군이 근거를 마련했다. 태기왕은 맞은편 태기산에서 조용히 산성을 쌓기 시작했다. 삼형제 장군들이 이끄는 주력부대와 병참은 뒤로 뚝 떨어져 삼형제봉에 머물렀다. 도사리에 있는 예군은 태기군이 아직도 살아남아 몰래 코앞에서 날개를 펼치고 예군을 유인해서 공격하려는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도사리 싸움 이후 4년이 흘렀을 때 예군의 첩자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예군을 따라 이주한 예국의 나무꾼이 나무를 하다 이동하는 태기군을 본 모양이었다. 잇따른 보고로 볼 때 적군의 정탐병은 회령봉과 태기산성의 군세는 발견하지 못하고 태기군의 흔적을 찾아 점점 더 깊이 삼형제봉 방향으로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하늘이 삼한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모양이었다.


태기왕은 간밤의 꿈에 보았던 태자가 떠올랐다.


"아바마마, 제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 눈의 화살을 뽑아주소서."

"아바마마, 제 마음이 느낄 수가 없습니다. 제 가슴의 화살을 뽑아주소서."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태자의 복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조금만 더 기회가 무르익으면 빼앗긴 땅과 백성을 되찾을 것 같았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하더라도 태기왕은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할 것 같았다.


'다시 예전의 삼한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살 수는 없을까? 이 땅에서 예를 쫓아내고는 다시 예전처럼 예와 같이 삼한에서 살아갈 수는 없을까?'


태기왕은 깨어진 자신의 꿈을 되살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건 죽은 아들에 대한, 군사에 대한 도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전쟁을 전쟁으로만 갚는다면 이 땅에 언제 살육이 끝나겠는가? 대체 평화는 언제 삼한에 깃들겠는가? 태기왕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건 이미 불가능해졌다.


태기왕이 애써 그런 꿈을 지우고 산성에서 사방을 둘러봤을 때, 다시 한 가닥 의혹이 떠올랐다. 호령장군이 사방에 보낸 세작이 물어온 정보에 따르면 낙랑에 새로 들어온 중국인 책략가들은 보통이 아니라고 했다. 자기네 땅에서 오랜 전쟁을 치르느라 그들의 이기기 위한 방략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방략은 가히 삼한 사람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들에게는 칼의 날카로움만이 문제였지, 그 칼로 가족에게 줄 음식을 만들지, 아니면 살육을 벌일지에 대해선 아무 관심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낙랑을 통해 몇 명의 책사가 예로 들어갔다고 했다. 태기왕은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나도록 예군에 아무 변동이 없자 점점 불안해지는 마음에 회령봉과 삼형제봉에 사람을 자주 보내 경계를 강화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