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태기왕 (5) 본문

글/단편소설

태기왕 (5)

조용한 3류 2015. 2. 4. 11:57

(5)


역시 걱정했던 대로 중국에서 온 책략가들은 모든 면에서 태기왕이나 호령보다 한 수 위였다. 그들은 먼저 속임으로 삼형제봉으로 정탐을 가는 시늉만 했다. 그러고는 양 날개의 포위 속으로 들어오기는커녕 먼저 한쪽 날개만 확실히 분질러 놓았다. 그리고 나머지 한쪽 날개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삼형제봉의 주력부대를 갈팡질팡 혼란에 빠뜨렸던 것이다.


아들을 묻었던 백옥포를 향해 줄달음질치던 태기왕은 그 북새통에 험했던 도사리 싸움에서도 고이 간직했던 태기국의 옥새를 잃어버렸다. 중간에 잠시 병사들과 몇 번의 숨을 돌린 것 말고는 전혀 쉴 틈도 없었다. 날은 다시 저물었다. 하룻밤과 하루 낮이 지나간 것이다. 천 여 명이나 되던 군사는 이미 차가운 주검이 되거나 목숨을 구해 뿔뿔이 흩어졌다. 이제 남은 건 태기왕과 삼형제 장군들뿐이었다.


네 사람은 마침내 4년 전에 태자를 묻었던 곳에 다다랐지만 무성한 갈대 속에서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는 없었다. 비참한 몰골의 네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폐하, 신들을 벌하소서."


삼형제 장군들은 울먹였다. 4년 전에도 그랬듯이 세 장군은 이번에도 싸움다운 싸움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쫓기기만 했다. 왕은 무릎 꿇은 그들을 편하게 앉게 했다. 아득히 멀리서 적군이 흙먼지를 말아 올리며 쫓아오는 게 보였다.


"잠시 숨 돌릴 시간은 있는 듯하구나."


태기왕은 별일 없다는 듯 붉게 타오르는 저녁놀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싶었다.


"태기라는 이름은 이제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인가?"


세 장군은 울부짖으며 무릎을 꿇었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 언젠간 내 마음을 삼한이 알아 줄 날이 올 걸세."


태기왕은 그래도 이승에 남겨놓을 건 그 마음뿐이라는 듯 세 사람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왕이 말하지 않은 바를 알아들은 것 같았다.


네 사람은 묵묵히 백옥포로 나아갔다. 뒤를 돌아 보니 맨 앞에서 쫓아오는 적군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였다. 적장의 조금 옆으로 말을 몰고 나오는 신승이 보였다. 의기양양한 얼굴에 입가의 두 가닥 수염이 애써 구별할 필요도 없이 눈앞에 드러났다. 삼형제 중에서 활을 제일 잘 쏘는 맏이가 마지막 남은 활을 들었다. 그러나 그가 팽팽하게 시위를 당겼을 때, 태기왕이 그의 팔을 잡았다.


"두어라. 지금은 그들의 세상이 아닌가?"


왕은 아직 남은 몇 걸음을 다친 몸으로 겨우 겨우 걸었다. 세 사람도 묵묵히 뒤를 따랐다. 화살을 피하려고 몸을 말 잔등에 납작 엎드렸던 신승은 다시 간사한 웃음을 띠며 말을 달렸다. 신승이 태기국의 마지막 숨통을 끊기 위해 백옥포에 다다랐을 때, 이미 굼실굼실 푸른 물은 왕과 세 신하를 삼켜 이 세상으로부터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데려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