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귀정굴 탈출기 (2) 본문

글/단편소설

귀정굴 탈출기 (2)

조용한 3류 2015. 2. 4. 12:03

(2)


그들 남자 네 명이 귀정굴에 온 여정은 5월에 있었던 어느 이공계 학회의 행운권 추첨에서 비롯됐다. 싱가폴 마리나베이 샌즈호텔의 3박 숙박권은 참석자라면 누구라도 응모할 만큼 인기가 있었는데, 그들 4명이 처음부터 당첨된 건 아니었다. 당연히 낙첨된 그들의 기억에서 호텔 이름이 가물 가물거릴 때가 되었을 때, 경품을 제공하는 여행사로부터 메일 하나가 날아 왔던 것이다. 당첨자가 여행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추가로 추첨을 했는데, 귀하께서 당첨이 됐다고, 다만 한 가지 협조에 동의해야만 숙박권을 수령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조건 역시 그들에겐 썩 괜찮았다. 조건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자기네 여행사에서 새로 개발한 국내 여행 상품을 체험하고 현장에서 의견을 달라는 거였고, 또 하나는 미안하지만 체험용 상품이라 부부동반이 어렵다는 거였다. 두 번째 조건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사람은 염교수 혼자였다. 그러나 그것도 아내가 듣는 앞에서 전화를 걸어 담당자에게 따졌던 식이라 그의 진심 여부를 확인할 길은 없다. 오히려 나머지 세 사람은 남성 전용 여행이 풍기는 환락의 냄새를 맡기 위해 코를 벌름거리는 형편이었는데, 그 후각의 성능은 누가 봐도 미인인 젊은 가이드를 보았을 때 절정에 다다른 듯했다. 그러나 당첨자가 자기만이 아니라 3명씩이나 더 있다는 걸 알고는 할 수 없이 조유나를 데면데면 대하기 시작했었다.


실제 여행은 그들의 그런 기대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일정을 제외하더라도 저녁만 되면 조유나는 다른 업무가 있다고 숙소인 호텔을 떠나 있었고, 남자 네 명도 학회 회원이라는 공통점을 빼고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 데다가 30대에서 60대까지 골고루 한 명씩 분포한 탓에 짧은 시간에 친밀해지기는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앞으로 같은 분야에서 어떻게 얽힐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서로 조심만 하는 눈치였다. 그러다보니 연장자이자 학회 회장인 염교수를 중심으로 나이에 따른 서열이 알게 모르게 유지되고 있었다.


게다가 일정도 그런 출장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 데에 일조를 했다. 첫날 태기산 밑의 리조트에 짐을 푼 일행은 태기국이라는, 전설 빼고는 아무것도 받쳐줄 게 없는 삼국시대 이전의 작은 부족 국가를 빌미 삼아 삼한시대의 이런저런 전설들을 실컷 들었고, 둘째 날은 화진포에서 이승만, 김일성 별장을 구실 삼아 또 그 시절 얘기를 실컷 듣고는 7호선 국도를 따라 아래로 내려왔었다. 볼 것도 먹을 것도 별 게 없는 여행임에도 불구하고 일행들이 군소리 없이 따른 것은 그런 얘기들을 지겹게 늘어놓은 이들이 나름 향토사학자라며 흰머리와 흰 수염을 휘두른 데다가 염교수가 소문처럼 지극히 점잖고 친절하게 협조한 덕이 컸다.


셋째 날은 첫날과 둘째 날과는 달리 아침부터 서둘렀다. 아마 워낙 일렀던 탓에 그들의 이동은 투숙한 호텔에서도 몰랐을 것이다. 주차장에서 내린 일행은 졸린 눈을 비비며 앞서 걷는 조유나를 따라 안개가 자욱한 강가를 걸어 올라갔다. 그다지 높지도 않은 계단을 몇 개 오르자, 안개로 강가가 눈앞에서 흐릿해지고 멀리 언뜻언뜻 보이는 강물은 이 세상이 아닌 듯 아득하게 보였다.


"햐, 선경이 따로 없구먼."


하사장의 감탄사가 울려나왔다.


"안개가 낀 걸 보니 오늘 낮은 맑겠는데요."


하사장은 자신의 흥을 깨는 박승호의 말에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가장 연장자이면서도 가장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걷던 염교수도 경치가 좋다며 하사장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곧 자신이 유학 시절에 걸핏하면 봤다던 나이아가라 폭포로 말머리를 돌렸다. 시종 점잖은 표정으로 침묵을 지키던 민중기는 계단이 생각보다 많아지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남자 넷은 맨 앞에서 그들을 이끄는 조유나의 미끈한 다리를 안개를 핑계 삼아 마음껏 쳐다보며 동굴 입구에 다다랐다. 그러나 그들은 안개와 그녀의 다리 탓에 계단 한쪽 옆으로 치워져 있었던 '통행금지'라는 작은 팻말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이윽고 헬멧을 하나씩 머리에 얹은 일행은 몸 하나 겨우 들어갈 시커먼 구멍으로 하나씩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