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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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철학
대학에 들어가니 말발이 센 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때 1, 2학년 남학생들은 문무대와 전방에 입소해서 병영교육을 여름방학에 받았었는데, 그곳에선 문, 이과들이 섞이는 바람에 순진무구한 동네에선 듣지 못했던 음담패설을 참 많이 들었었다. 금지됐던 걸 빨리 맛본다고 뭐가 되는 것도 아니건만 인간이란 틈만 주어지면 금단의 열매에 접근하려는 본능이 있는지도 모른다.
음담패설보다 조금 수준이 있고, 어찌 보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가 바로 개똥철학이라 부를 수 있는 거였다. 문무대에서 잠자리에 누워 뒤척이는데 최고의 말발을 자랑하던 친구가 문득 대중에게 물었다. "너희들, 운명, 숙명, 천명의 차이를 아니?" 물론 아이들이 알 리는 없었다. '말발'은 쟁반 위에 구르는 구슬을 빗대어 이건 운명이고, 저건 숙명이고, 구슬이 쟁반에 놓였다는 자체가 천명이라는, 귀신도 아니건만 씻나락을 까먹는 소리를 해서 몇 명의 눈을 초롱초롱하게 만들고는 저는 먼저 코를 골곤 했었다.
그런 류의 얘기는 기숙사를 통해서도 많이 내려왔다. 각 지방에서 자칭 내로라 하는 친구들이 모였으니 그들의 선후배 골짜기를 따라 면면히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도도할 법도 했다. 고교 시절에 '정석'이나 '종합영어'보다 무협지에 더 심취했었다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곧잘 사자성어를 끄집어냈었다. 물론 한자로 넉 자를 이룬다고 해서 다 곡절이나 교훈을 갖고 있을 리는 만무하건만, 아이들은 나중엔 주화입마까지 그럴듯하게 들었던 것이다. 무협지를 작품성이 없다면 멀리 내쳤던 나는 그 친구의 얘기를 대부분 유치하다고 코웃음쳤지만 점점 귀를 기울이게 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뒤늦게 나는 서른 중반에 김용의 '의천도룡기'를 접한다.)
그 친구는 술자리에서 '운칠기삼'을 후렴구처럼 입에 올렸다. 선천적인 게 7 후천적인 게 3이라는 소리일진대, 그 7과 3이 어떻게 도출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그걸 문제시하면 답답한 이과라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다. 그래도 어쩌다 그런 얘기가 나오면 운이 10이면 다 끝났다는 소리이고 기가 5이면 할 수 있는데도 너무 게으르게 산다는 소리이니, 대충 대세는 정해졌지만 일말의 희망은 남겨놓는 식으로 운칠기삼이라고 했겠지, 라는 말들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그렇다. 운칠기삼이 아니라 운팔기이라고 해서 내가 더 좌절하고, 운육기사라 해서 사라진 의욕이 탱천할 리는 없다. 그런데 그 비율이 그냥 주어진 게 아니라는 생각을 언젠가 하게 됐다. 그것도 마흔 넘어서.
직장이나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서로 생각이 다를 때도 있고 어떨 때는 그 다름이 차이를 넘어 옳고 그름의 문제로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서로 이해관계까지 얽히면 뭐 하러 초등학교 때부터 '도덕'이라는 걸 배웠을까 할 정도로 추하게 다투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래도 1:2인 경우는 내가 소수라 해도 금방 승부가 나는 게 아니었다. 특히 숫자에서는 열세여도 옳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 열세는 오히려 전의를 불태울 수도 있었다. 그런데 1:3을 겪어보니 그건 아니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등장했고 억울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바로 1:3은 진실도 뒤집을 수 있는 비율이었다. 여기서 숫자는 꼭 사람이아니라 조직일 수도 있고 자신이 당면한 문제일 수도 있었다.
그러면 이제 이 두 비율을 곰곰이 따져보자. 비교하기 위해 전체 합을 10으로 놓으면 1:2는 3.3:6.6, 1:3은 2.5:7.5이다. 즉 상대가 6.6이면 의욕을 불태울 수도 있었지만 7.5이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7이 바로 6.6과 7.5의 중간값이었다. 아하, 이래서 운칠기삼이라고 했구나... 거의 정해져 있지만 확정됐다고 말할 수는 없는. 나는 혼자 어허, 어허, 하며 스스로의 개똥철학에 잠시나마 취했던 적이 있다.
(2012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