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제가 지금 여기 있나이다.[2] 본문
개종한 다음날 나는 첫 기도를 드렸고 두 번째 성경 통독에 들어갔다.
두 번째 읽으니, 조금이라도 지식이 느니, 읽기에 좋았다.
레위기도, 민수기도, 열왕기도 재미있어졌다.
다윗은 여전히 좋았고, 욥은 더 좋아졌고 요한복음은 정말 좋았다.
그런데, 그런데 바울서신이 문제였다.
특히 로마서만은 첫 번째 읽을 때보다 오히려 싫어졌다.
나중엔 답답하고 머리가 터질 것 같아 성경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였다.
마누라는 그런 내가 안타까웠는지(수상했는지?) 목사님이 로마서 설교를 시작했다며 교회에 데려가려고 했다.
그 바람에 몹시 다퉜지만, (부부싸움 내용은 관심이 없을 것 같아 제외함.)
그 와중에도 불교 생각이 안 난 걸 보면 참 신기할 뿐이다.
원래 나는 성경과 다른 책들을 읽으면서 서서히 구체적인 선택을 하고 싶었다.
가톨릭 또는 개신교?
개신교라면 어느 교파?
그럼 교단은? 거기까지는 힘들겠지...
물론 겪어보지 않고 알기 어렵겠지만, 평신도는 차이를 느끼기 어렵겠지만,
그래도 생각을 해보긴 해봤다는, 말할 수는 없어도 느낌이 좋았다는,
그런 말은 하고 싶었다.
물론 총론에서부터 도저히 함께 할 수 없는 이유를 발견할 수도 있겠다.
그러니 선택을 위한 고민을 본격적으로 하기도 전에
나를 자기 교회로 데려가려는 마누라가 곱게 보일 턱이 없었다.
그 수 많았던(?) 마누라와 나 사이의 종교적 갈등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나는 온갖 고뇌 끝에 신을 사랑하는 게 진정한 아가페라고 생각하지만
교회에 나가기도 전에 성령이 임했던 마누라는 그런 고뇌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어쨌든, 마누라가 '맹신'이 아닐까, 남편이 '이단'이 아닐까, 하며 서로 의혹을 품는 부부는
몇 번의 대전을 치르면서 상대방의 종교적 진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처음 생각대로 차근차근 걸어가기로 했는데, 그 걸음에 묘한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날도 마누라와 한참 다투고 인터넷을 뒤적거리던 나는 우연히 한 사이트를 발견했다.
각 나라의 언어로 꾸란(코란)이 올려져 있었는데 한국어 번역도 있었다.
(관심 있는 분은 <그 외> 폴더의 '꾸란'을 참고하시길.)
무엇에 끌리듯이 처음부터 넘겨갔다.
이슬람교에서 삼위일체는 부정되었다. 십자가 죽음도, 따라서 부활도.
예수님은 단지 인간 예언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요한복음에 그 답이 명시적으로 씌어 있다는 거였다.
처음부터 삼위일체가 따악 나오고,
최측근이었던 사도 요한이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갈리리 호수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이 식사하고 등등...
읽을 때마다 그렇게 가슴을 뜨겁게 하던 요한복음에 바로 그렇게 씌어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요한복음에 대해 감사의 눈물을 그렁거리고 있을 때
또 하나가 느껴진 것이다.
뜻밖에 가톨릭에 대한 마음이 사라진 거였다. (나는 가톨릭에 대한 어떤 부정적인 의도도 없다.)
나는 아직도 그 상관성을 전혀 모르고 있다.
다만, 꾸란을 읽으면서 오히려 '오직 예수'가 강조됐을까, 막연히 생각할 따름이다.
어쨌든 내가 세상 모든 여자를 다 고민해 본 이후에 마누라를 선택하지 않았듯이
마음이 안 생기는데 굳이 알아볼 필요는 없었다.
한편, 나는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를 보고 있었는데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간의 논쟁 부분에서 힘 있게 한 줄을 그었다.
선악이 다만 우리들의 자유의지에만 의존하는 것이라면, 종교는 어쩔 수 없이 도덕론에 떨어지고 만다.
옳거니. 적어도 신의 종교는 인간의 도덕, 그 이상이어야 했다.
그건 종교에 대한 나의 요구의 최소치였다.
하지만 종교개혁 후에 정통주의에 반대해서 일어났던 경건주의,
합리주의(자유주의)의 요소들이 내 속에 상당히 도사리고 있음도 느꼈다.
당연하지 않은가? 원칙적으로 자기 수행 100%인, 불교 신자였던 내게서 어떻게 자유의지의 체취가 나지 않겠는가?
그런 상태에서 나는 설교 영상들을 두루 찾아보고 있었는데,
마누라로부터 내가 로마서, 하면 머리를 아파한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사방에서 압박을 해왔다.
로마서? 감명이요, 핵심이요, 엑기스요... 어느 교회 목사님의 로마서 강해를 들어봐라...자기 남편은 왜 그래?
하필이면 설교들 중에서 감명 깊이 들은 게 로마서에 관한 거였고
게다가 올해 분당에서 유난히 로마서를 다루고 있는 교회가 많았지만
난 여전히 로마서에서 별 감명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삼일교회 송태근 목사님의 로마서 5강에서 아래의 질문이 나왔다.
여러분, '믿음'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불신'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반대말을 '행위'입니다...
그 다음날, 칭의에서 시작된 검색은 길지 않은 시간 안에 칼빈주의 5대 교리와 알미니아니즘에 이르렀다.
지금껏 살아온 나로 본다면 당연히 자유의지가 남아 있는 알미니안주의가 자연스러웠다.
그런데 칼빈주의 5대 교리의 한 항목이 시선을 붙들었다.
불가항력적 은혜...
(관심있는 분은 <기독교-자료> 폴더의 '칼빈주의 5대교리'를 참조하시길.)
나는 연초의 그날 오전이 떠올랐다.
안 따질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체험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건 분명 아니었다.
이윽고 나는, 장로교 교회로 정하기로 했다.
나의 애씀인지, 마누라의 간구함인지
결국 마누라의 소원대로 되었고, 그게 모두 주님의 뜻임을 믿는다.하지만 나는...
아직도 로마서에서 감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3]편마저 쓴 후에 감사를 드리려고 계속 미루어왔습니다.그러나 언제 쓰게 될지 모르겠고, 담아두기엔 너무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가족을 이끌어달라고 오랫동안 주님께 간구해 주신 두 분이 계십니다.
집사람한테 전해 듣고 왜 괜한 일을 하시는가 했었는데^^두 분의 기도에서 오늘이 비롯되었음을 느낍니다.
감사합니다.
99년에 선물로 받은 성경을 15년도 지나 읽었습니다.
한글개역이고 글씨가 작았지만,
덕분에 가독력이 부쩍 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모든 걸 은밀히 보실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