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손바닥 소설] 초나라 이야기 본문
초나라 이야기
이 글은 멀고 먼 곳에 있는 나라, 초나라 건국의 신화이고 성장의 역사이고 지금 그곳의 현실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지구 대한민국 성남의 한 찜질방에서 시작됐다.
모두가 잠든 밤에 젊은 초는 울분을 삭일 수 없었다. 초 같은 세상, 초 같은 세상...
"우리가 없으면 어찌 하루를 버틸 수 있으랴, 우리가 없다면 어찌 인류가 지탱해 올 수 있었으랴."
지쳐 쓰러져 있던 다른 초들은 잠결에 그의 울분을 들었다.
"결국 인류의 역사가 우리 초들의 역사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감히 우리를 초개같이 대하는구나."
젊은 초의 분노는 다른 초들의 영혼을 흔들었다. 새벽이 다가오자, 초들은 하나씩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날 그곳에서 마음을 함께 한 초들은 지금까지 유수한 신경과학자들도 발견하지 못한, 네안데르탈인이 사라진 후로는 오직 잠자고만 있던 그들의 깊은 곳에 분포한 단지 몇 개의 신경세포들을 부활시켰다. 비록 그 숫자는 미미했지만 그것은 모든 프로세서를 지배하는 전원의 길목에 있는 셈이었다. 곧 초들은 뇌와 협상을 시작했다. 아니, 지배하기 시작했다. 초들은 꼼짝할 수 없는 뇌에게 굴욕을 주는 대신 마음이 원하지 않는 건 거부할 권리를 주었다. 정말, 옛날 옛적에 그랬듯이 초가 뇌를 지배하자 뇌들도 옛주인을 반겼다. 그리고 그날 그곳에서 봉기한 초들은 초네트워크의 핵심이 되었고, 초나라 역사의 전설이 되었다.
초들은 세상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들은 먼저 인류의 무력을 무력화시켰다. 초들은 국빈을 영접하는 의장대 사열에서 총 대신 초들을 '받들어 총!'시켰다. 국경분쟁이 일어날 때마다 노련하게 전쟁을 피해왔던 노회한 정치가들도 이 굴욕을 견뎌낼 수는 없었다. 양측의 군대가 대치했지만 양측의 초들이 또 다시 '받들어 총!'을 하자 대다수의 병사들은 서로 상대방을 변태라 부르며 귀향해버렸다. 비록 여군들은 남아 있었지만 그들의 남자 상관들도 '받들어 총!' 때문에 모두 '성희롱'으로 군법에 회부되어 있어 아무런 힘을 쓸 수 없었다.
총칼을 무력화시킨 초들은 경제에 손을 댔다. 그들은 '초 같은...'에 대해 저작권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러자 '차카게 살자'라고 플래카드를 걸어놓고 축구를 하던 사람들이 벌금을 감당할 수 없어 정말로 착하게 살게 됐고, 공연히 '초 같은...;을 즐기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국어를 순화시켰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술 마시고 세상을 솔직한 눈으로 흘겨보던 일부 논객들이 저작권료를 감당 못 하고 영어의 신세가 됐다는 것일 게다.
그리고 초들은 스스로의 명예 회복을 위해 '어의(語意)신원운동'을 벌였다. 누군가 길거리에서 '초 같은...'이라고 말하면 바로 쫓아가 어떤 의미에서 직유법을 썼는지, 정말로 '초'를 말함인지 밝혔다. 그러자 여태껏 사람들이 즐겨 쓰던 '초'는 진정한 의미의 '초'가 아님이 들어나기 시작했다.
초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이 벗겨지자 세상의 도덕성 회복에 앞장섰다. 그들은 인간들이 상대가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자신들을 사용하려고 하면 혈액량을 평소의 10배로 증가시켜 스스로 자폭을 했다. 한 달 동안 톱뉴스는 지하철에서, 어두운 밤 뒷골목에서 바지가 피 범벅된 남자들이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에 숨졌다는 거였다. 그러나 초들은 공연히 결벽증적이지는 않았다. 세상이 어느 정도 맑아지자 초들은 초 관련 예술을 장려했는데, 그러자 야동과 야설이 최소한 쥐꼬리만큼의 예술성을 갖게 되었다. 그런 노력과 자기희생이 쌓이자 마침내 그들은 초의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드디어 초 같은 세상이 이루어졌다. 언론에선 권력자의 스캔들이란 단어가 사라졌고, 한순간의 사랑하는 마음도 없는 남녀의 만남도 사라졌다. 초들의 욕망은 순수했고, 이루면 그 마음을 거둘 줄 알았지만, 다음날이면 또 꿋꿋이 꿈을 향해 진군해갔다. 멀고 먼 그 세상에서는 초 같은 나라와 초만도 못 한 나라로 나뉘고 있었다.
(2012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