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성경 읽는 재미 (6) - 세상을 사랑하는가? 본문
3독 중에 드디어 '요한'에 이른다.
'요한'... 내 감격의 원천,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그렇게 읽어가다가 멈춘다. 말이 얽히며 이해가 멈췄다.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14:24)
부활하신 후에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거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시자 또 다른 유다가 왜 제자들에게만 보이려 하시나이까, 묻는다.
그 물음에, 예수께서는 답을 하신다. 당신을 사랑하는 자와 그렇지 아니한 자로 나누어.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요14:19)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요14:22-24)
주석서를 봐도, 영어 번역을 봐도 별 다른 게 없다. 아니, 이해 안 될 게 뭐 있니, 하는 투다.
아내에게 물어봐도 그녀는 열심히 얘기를 해주는데 나는 뭔가 답답하다.
세속적 영광을 쫓는 것보다는 묵묵히 주를 사랑하는 길이 옳다는, 그 말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것이라는 얘기들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나는 왜 답답하고 이해가 안 갔을까?
마치 이 물은 차고, 이 물은 뜨겁다는 말을 들어도 영 성에 차지 않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답답할 때는 당장, 직렬적으로 풀려는 것보다 계속 마음 속에 가지면서 끝임없이 들여다 보는 게 효율적일 수 있다. (묵상이랄 수도 있고, 명상이랄 수도 있고...)
i 먼저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부분이 달랐다. 온 세상에 부활을 직접 알리시는 게 낫지 않느냐고 생각한 거였다. 즉, 세속적 이유가 아닌 전도적 이유였다. 그러니 23, 24 절이 무척 생뚱맞게 들릴 수밖에.
ii 그리고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부분을 삼위일체가 깨지는 것으로 이해를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면 구원의 통로가 마련되지만,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역사로부터 아무 도움을 못 받는다는, 그런 해석이었다.
그런데 그러는 와중에 내가 이렇게 헤맨 이유가 다른 것 때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간 옷이 아름답다는 내용의 어떤 긴 문장이 이해가 안 된 게 그 현란한 수사나 복잡한 문장 구조 때문이 아니라, 빨간색을 싫어하는 본인의 정서(취향?) 때문일 수 있다는...
앞에서 읽은 구절들이 떠올랐다. 한 데 모았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요14:21)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
즉, 서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였다.
나는 인간을 사랑하는가?
지난 15년 세월의 그 모습들을 딛고 인간들을 사랑하는가?
나는 다음 말로 방패를 삼으며 일단 도피한다. 이제 벼랑 끝에 다다른 거다. 또 이 벼랑, 결국 이 벼랑이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누가복음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