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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동네로 간 목사
조선일보 | 송혜진 기자 | 입력 2016.05.28. 03:03
2014년 10월 어느 날 밤 11시 40분쯤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는 흑인 동네 노스센트럴(North Central). 이 동네에 사는 이태후(51) 목사는 집에 있다가 스무 발 넘는 총소리를 들었다. 두 명의 흑인 갱들이 어떤 남자의 집에 쳐들어가 총 36발을 난사한 사건이 일어난 날이었다. 잔인하게 살해된 남자의 초등학교 3학년 조카는 삼촌과 TV를 보고 있다가 괴한들이 쏜 총알들이 삼촌 몸에 박히는 것을 봐야 했다. 이 목사는 잠시 눈을 감았다. "생각해보세요. 그 아이가 들었던 그 총소리, 터져버린 총알이 내뿜는 화약 냄새. 이런 것들이 아이에게 얼마나 끔찍한 트라우마가 될지요. 우리 동네에선 이런 사건들이 일상이에요. 제가 그곳에서 목회를 하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이 목사는 2003년부터 13년째 노스센트럴에서 살고 있다. 서울대 미학과와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졸업한 그는 뉴욕 한인교회에서 7년 동안 사역하다가 이곳에 정착했다. 노스센트럴은 미국에서도 가장 범죄율이 높은 지역 중 하나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4년 연속 미국에서 가장 살인사건이 많이 일어난 도시로 꼽혔다. 주민 94%가량이 흑인이고 이 중 45%가 절대 빈곤층 또는 빈민으로 분류된다. 2006년도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이 지역 건물 중 44%가 빈 채로 버려졌다. 전기와 수도가 끊긴 빈집에서 지내는 불법 거주자(squatter)들이 활개를 치고, 마약 관련 사건·사고와 총기 살인 소식이 끊이지 않는 동네다. 필라델피아 시경이 이곳에서 하루 137명의 마약 사범을 검거한 날도 있었다. 이 목사는 "처음 온 사람은 대낮에도 차에서 내리기는커녕 차를 세우기도 무서워하는 동네"라고 했다. 그는 대체 왜 이런 우범 지역에 갔을까.
지난 18일 오후 잠시 귀국해 서울에 머물고 있는 이 목사를 서울 정동길에서 만났다. 햇살이 날카롭게 살갗을 파고드는 오후였다. 그가 입은 흰색 티셔츠엔 곱슬머리에 선글라스를 낀 필라델피아 흑인 화가 바클리 L 헨드릭스의 얼굴이, 셔츠 뒷면엔 '쿨한 놈의 탄생(Birth of the cool)'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청바지를 입었고 어깨엔 맥북이 담긴 가방을 멨다. 목사처럼 보이지 않는 차림새였다. 이 목사는 짧고 경쾌하게 답했다. "그 동네야말로 복음이 필요할 거라고 믿었습니다.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죠."
美 최악 우범 지역에 사는 한인 목사
―노스센트럴에서 어떤 일을 하시는 거죠.
"특별한 건 없어요. 그냥 그곳 주민들과 어울려 살아요. 아침엔 커피 한 잔 들고 현관문 앞에 앉아 사람들과 말을 섞고, 여름엔 모여서 바비큐 해먹으면서 수다 떨고. 누가 죽으면 장례식 처리를 도와주고, 누가 법원에 가야 한다고 하면 같이 가서 대리인을 서주죠. 일 며칠 못해서 먹을 게 없는 사람에겐 라면 좀 챙겨주고, 세탁소에서 사람들이 안 찾아가는 옷을 받아다가 옷 없는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그게 다예요."
―설교는 안 합니까.
"'스피릿 앤드 트루스(Spirit & Truth)'라는 인근 교회 협동 목사로 있긴 한데, 제가 사는 지역이랑 조금 떨어져 있어요. 주일엔 그곳에 가서 기도도 하고 가끔 설교도 하지만, 제가 사는 동네에서 주민들에게 따로 설교를 하진 않아요. 이 사람들에게 그보다 급한 게 있거든요."
―그게 뭔가요.
"항상 곁에 있어 줄 사람이요. 마약 사범이 이곳에서 한 명 죽었다 쳐요. 보통 사람들 눈엔 그냥 범죄자이겠지만 이 동네에선 그도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남편, 아버지예요. 그 시신을 처리하고 그 죽음으로 충격과 상처를 받은 가족을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그럴 때면 제가 이런저런 심부름도 해주고 그러는 거죠."
이 목사가 처음부터 그들과 어울려 지낸 것은 아니다. '필라델피아의 할렘'이라고 불리는 이곳엔 동양인 거주자는 물론 동양인이 오는 일도 거의 없다. 처음엔 대부분 사람이 그를 경계했다. 말을 거는 사람도 없었다. 이 목사는 개의치 않고 매일 거리 청소를 했다. 지저분한 쓰레기를 치우고 꽃 화분을 여기저기 갖다놓았다.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동네가 조금씩 밝아졌고 6개월쯤 지났을 때 사람들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뭐 하는 사람이오?" 그가 "목사"라고 대답하면 주민들은 어리둥절해했다고 한다. 흑인 목사들조차도 살지 않는 동네였기 때문이다. 지금 노스센트럴 흑인들은 모두 그를 '레버런드 리(Reverend Lee·이 목사님)'라고 부른다.
―보통은 사역을 하더라도 안전한 지역에 살면서 출퇴근을 하겠죠.
"교회야 그 사람들 주변에 있겠지만, 사람들이 안 가면 소용이 없는 걸요. 저는 '교회로 오라'고 하는 것보다 제가 그들과 함께 사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어요. 목회를 꼭 교회에서 해야 하는 건 아니거든요. 복음을 전파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는 이들을 위한 좋은 이웃이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고 그걸 실행에 옮기고 있을 뿐입니다."
―위험하잖습니까.
"글쎄요. 이곳은 '블랙 온 블랙', 다시 말해 자기들끼리 벌어지는 범죄가 많아서 저 같은 외지인은 오히려 괜찮을 수 있어요. 하긴 최근에 밤늦게 은행 ATM기 앞에서 처음으로 권총 강도를 만나긴 했어요. 무작정 총을 들이대길래 지갑 꺼내 돈 보여주고 다 줬더니 들고 사라지더라고요. 쉽진 않지만 지금까진 잘 대처하고 있습니다."
가난의 대물림 끊는 법 가르친다
이태후 목사가 이 지역에서 더욱 유명해진 건 2006년부터 매년 여름 한 달간 골목길 한 블록에 차가 다니지 못하도록 거리를 막아놓고 동네 아이들을 맘껏 뛰어놀게 하는 이른바 ‘여름 캠프’를 시작하면서부터다. 처음 캠프를 열 때만 해도 아이들이 15명 정도 모였는데, 요즘엔 6~15세 아이들 140명가량 찾아온다고 했다.
―길거리에서 열리는 여름성경학교 같은 건가요?
“비슷해요. 여름방학 기간에 시청에 ‘플레이 스트리트(Play Street)’라는 프로그램을 신청할 수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됐어요. 빈민가 아이들을 위해 매일 아침 10시부터 오후 3시까지 차가 다니지 못하도록 길을 막아놓고 아이들을 뛰어놀도록 해준다는 거죠. 시청에서 공짜로 점심도 준다고 하고요. 이곳 아이들은 방학이 되면 딱히 갈 데가 없어서 방황하거든요. ‘내가 그걸 신청해서 진행하고 자원봉사자를 불러 모은 뒤 아이들에게 밥도 주고, 공부도 가르치고, 실컷 놀게 해주면 좋겠다’ 싶었죠.”
―캠프에선 뭘 가르칩니까.
“4주간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열리는데, 월·화·목요일은 정규 수업을 해요. 아침엔 간단하게 찬양을 배워요. 점심을 먹고 나서는 그림을 그리거나 만들기를 하고 다 같이 마셜 아트(태권도나 가라테, 유도 등의 격투 기술)를 배우기도 하죠. 수요일엔 다 같이 버스를 타고 45분쯤 떨어진 공용 수영장에 가서 물놀이를 하고요. 금요일엔 소풍을 가요. 수족관에도 가고 동물원에도 가고. 그야말로 다 같이 한 달간 재밌고 신나게 노는 거예요.” 이 목사는 설명과 함께 캠프 현장을 녹화한 동영상을 보여줬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얼굴에 그림을 그려가며 깔깔 웃는 아이들의 환한 표정이 동영상 가득 펼쳐졌다. 우범 지역에서 열리는 여름 캠프 풍경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성경 공부도 하나요.
“아침에 짧게 하는데, 이때 사람에게 살아가면서 필요한 기본 윤리를 가르치죠. 왜 땀 흘려 일을 해야 하는지, 가족이 무엇인지, 결혼을 하는 것은 왜 중요한지 같은 것들이요. 이 동네 아이들은 대부분 일을 해서 돈을 버는 법을 배우지 못하거든요. 어렸을 때 자연스럽게 마약부터 손대게 되죠. 아버지들도 보통 집에 없어요. 아이가 넷인데 그 아빠가 모두 제각각인 집도 있고요. 생명을 낳으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 가정을 지켜야 한다는 것, 그런 것들을 가르칩니다.”
―여름에 4주 동안 배운다고 아이들이 달라지나요.
“그럼요. 이 동네 아이들은 학력 수준이 상상 이상으로 낮아요.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고 대부분 꿈이 없어요. 남자 아이들은 농구 선수, 힙합 가수, 갱스터가 되고 싶다고만 하고 여자 아이들은 모델 아니면 엄마가 되겠다고 하죠. 다른 직업이 뭐가 있는지조차 모르니까요. 그런데 4주 동안 캠프에서 자원봉사자 선생님들과 놀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적인 자극을 받죠. 캠프가 끝날 무렵엔 아이들 꿈이 꽤 다양해집니다. 대학은 백인이나 동양인만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이 엔지니어나 변호사, 건축설계사가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캠프 내내 뚱하던 아이들도 제법 있는데, 막상 그런 녀석들이 캠프 끝날 때가 되면 ‘캠프가 너무 짧다’고 투덜대기도 하죠. 부모도 덩달아 변해요. 자기 자식 눈빛이 초롱초롱해지는데 마음이 안 열리는 부모가 어딨겠어요. 한번은 동네 마약 거래 조직 두목이 찾아와서 ‘아이들을 가르쳐줘서 고맙다’고 돈을 준 적도 있어요. 마약상의 돈을 받을 순 없어서 ‘마음만 받겠다’고 했죠.(웃음)”
―빈민층 아이에게 실현 못 할 꿈을 공연히 심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아요. 현실적인 꿈을 꾸게 하는 거죠. 꿈은 아는 만큼 꾸는 겁니다. 나도 일을 할 수 있다는 것, 나도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건 배워야 알아요. 그걸 알고 난 아이들의 표정은 자기 만족감과 자신감에 넘치고요. 마약 거래하는 아이들도 사실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싶어해요. 일자리를 어떻게 잡을지 몰라 헤매다 결국 마약에 빠지는 거죠. 저는 아이들에게 모두 대학을 가라거나 화이트칼라가 되라고 가르치지 않아요. 배관, 용접, 미용 같은 기술을 배워서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 그렇게 충분히 자립할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거죠.
모두를 위한 평화
이태후 목사는 서울 신길동 동천교회 담임목사였고 현재 원로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헌신적으로 교회와 신도를 섬기는 아버지를 보며 이 목사는 ‘나는 아무래도 목사는 못하겠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미국 유학 후엔 돌아와서 교수가 될 생각도 잠시 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는 아버지처럼 목회자가 돼 있었다.
―결국 목사의 길을 택하신 이유가 있나요.
“단순 무식하게 생각했어요. 학부 전공인 미학을 위해 내가 평생을 바칠 수 있을까, 죽을 수 있을까. 글쎄요, 별로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안 들더라고요. 그때부터 ‘하나님은 내게 어떤 소명을 주려고 하시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고민을 많이 했죠. 그 고민 끝에 신학교에 진학했고요.”
―공부를 하니 결론이 나오던가요.
“제겐 한국 교회를 보면서 오랫동안 품었던 고민과 회의가 있었어요. 저는 1980년대 대학을 다닌 세대예요. 한쪽에선 분신하고 뛰어내리며 투쟁하는데, 교회에선 찬송가만 부르고 있는 걸 봤죠. 사람들에게 당장 일자리가 없고 밥을 먹지 못하는 이들도 많은데 대형 교회가 줄줄이 생기는 것도 봤고요. 복음이 인류를 향한 기쁜 소식임을 믿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사람들을 설득할까, 아니 어떻게 살아야 복음을 알릴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신학 공부를 하면서 확실해진 건 한국 교회가 전파하는 지극히 단편적이고 얕은 구원, 다시 말해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식의 개인주의적 구원은 기독교가 전파하는 구원에서 지극히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는 거죠. 메시지는 명확합니다. 나와 하나님, 나와 나 자신, 나와 타인, 나와 생태계 간의 관계와 평화가 깨지지 않아야 진정한 구원을 얻을 수 있어요. 가령 미국이라면 동양인과 흑인, 흑인과 백인, 기독교와 무슬림, 개신교와 가톨릭이 화합하는 것이 샬롬(shalom· 평화)을 회복하는 길이 되겠죠.” 그는 2013년 한국에 잠시 들어와 머물 때도 서울 하월곡동 성매매촌인 속칭 ‘미아리 텍사스’에서 성매매 여성들에게 장미꽃과 초콜릿, 카드를 나눠주는 무료 공연을 두 차례 열었었다.
이 목사는 최근 필라델피아시에서 싸게 경매로 내놓은 125㎡(약 38평) 정도 크기의 건물을 하나 샀다. 그 건물 옆 빈 땅도 경매로 함께 구매했다. 그는 자금을 모아 그 자리에 커뮤니티센터를 하나 짓고 싶다고 했다.
―어떤 용도로 쓰려는 거죠.
“아이들을 위한 방과 후 학교도 열고, 동네 사람들을 위한 교육도 하고, 기도 모임도 할 수 있는 곳이요. 특히 방과 후 학교를 꼭 하고 싶은데, 이곳 아이들은 학교 끝나고 3시부터 저녁 먹기 직전 6시까지 뭘 할지 몰라 동네를 방황하거든요. 그러면서 나쁜 길로 빠지기 쉬워요. 통계를 보니 아이들이 처음 범죄나 마약에 빠지는 때가 보통 9~13세래요. 이 시기만 잘 넘기면 범죄에 빠질 확률이 아주 낮아지고요. 다시 말해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아이들을 건전하고 안전한 곳에서 숙제하고, 간식 먹고, 뭔가 배우면 아이들이 잘 자랄 확률이 높아진다는 얘기죠.”
―그건 나라에서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미국은 복지국가이고 비슷한 프로그램이 여기저기 많죠. 문제는 사람들이 그런 곳에 선뜻 가지 않는다는 데 있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그 프로그램은 공공 서비스일 뿐 지역 주민들과의 개인적인 신뢰 관계를 토대로 나온 것이 아니거든요. 결국 이런 건 동네 사람들과 친하고 잘 아는 사람이 운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들의 이웃인 제가 해보고 싶은 거예요.”
―그 자금을 모으려면 결국 교회에서 설교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헌금이 걷힐 텐데요.
이 목사는 이 질문에 싱긋 웃으며 “네. 방법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커뮤니티센터를 짓는다면 제일 먼저 해보고 싶은 건 무엇인가요.
이태후 목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토스트와 계란, 우유”라고 대답했다. 어리둥절해하자 그는 웃으며 “밥이요”라고 덧붙였다. “이곳 아이들은 아침을 제대로 못 먹고 학교에 가거든요. 절반은 굶고 절반은 엄마가 쥐여준 1달러로 탄산음료나 사탕을 사서 아침을 때워요. 그럼 수업을 제대로 못 들어요. 설탕에 취해 수업 시간 내내 뛰어다니거나 배고픔과 배 아픔을 혼동하고 누워 있거나 둘 중 하나죠. 그런 아이들에게 아침밥을 줄 수 있다면 학교 공부를 더 잘할 수 있겠죠. 거창할 필요는 없어요. 토스트, 계란, 우유면 될 것 같아요.”
그와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 뒤늦게 이 목사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다. 당신이 지금 노스센트럴 빈민가 아이들에게 주고 싶어하는 것들이 모두 한 글자 단어였다고. 밥과 땀과 꿈이 그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