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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옴] "손톱 좀 깎아주세요" 일주일 뒤 아들은...

조용한 3류 2014. 3. 14. 11:04

칠흑 같은 어둠이었어도

이젠, 한 점의 빛이 다가오기를 간절히 빕니다.

 


 

[프리미엄 리포트]"손톱 좀 깎아주세요" 일주일 뒤 아들은..

 

[자살前 그들은] ‘조용한 신호’를 보내온다

 

[손효주 hjson@donga.com·신광영 기자   동아일보 | 입력2014.03.14 03:07 | 수정2014.03.14 09:14]

 

#1. 중3 아들(이모 군·15·이하 모두 사망당시 나이)이 손톱깎이를 들고 다가왔다.

 

"아빠, 저 손톱 좀 깎아주세요." 애교 많던 아들은 3개월 전부터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한 달 전에는 "앞이 안 보인다"고 호소해 안과에 데려갔지만 "이상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 2주 전부터는 "언제 출장가세요?"라고 자주 물었다. 걱정이 커질 무렵 "손톱을 깎아달라"며 다가와준 아들이 고마웠다. 일주일 뒤, 아들은 집에서 목을 맸다. 아버지가 출장 간 사이였다. 아들은 학교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2. "숨쉬기가 힘든데…." 

 

남편(최모 씨·51)은 아내(46)에게 가슴 압박감을 호소했다. 병원에 가도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오래 살 수 있을까?" 남편이 무심히 물었다. 무직인 남편은 평소 아내가 퇴근할 때까지 설거지를 해놓는 법이 없었다. 어느 날 남편은 설거지를 깨끗이 해놓았다. 평소 전화를 하지 않던 남편은 이날 아내에게 4번 전화를 했다. 다음 날 남편은 오랜만에 아내를 회사에 데려다줬다. 몇 시간 뒤 남편은 자살했다.

 

스스로 생을 끝내기로 결정한 이들은 자살 전 저마다 '조용한 신호'를 보낸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자살자 60명에 대한 심리적 부검 결과를 분석해보니 52명(86.7%)이 가족에게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다'는 뜻을 담은 신호를 보냈다. 이 중 대부분은 일상 행동에 변화를 보이는 수준의 소소하고 조용한 신호였다.

 

이 군이 손톱을 깎아달라고 한 건 모든 문제를 부모가 해결해주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심리의 발현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겪고 있으니 어릴 때처럼 도와달라는 신호였다. 이 군과 최 씨가 갑자기 앞이 안 보인다거나 가슴이 답답하다는 등 신체적 고통을 호소한 건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가족들은 조용히 스쳐가는 자살 신호를 알아채지 못한다. 신호를 보낸 뒤 자살한 52명의 유가족(52명) 중 24명(46.1%)은 신호를 감지하지 못했다. 가족을 떠나보내고서야 뒤늦게 신호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하는 마음에 '살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인 이 신호를 애써 못 본 척하기도 한다. 유가족 20명(38.5%)은 자살 신호라는 걸 알고도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

 

자신이 보낸 신호를 아무도 몰라주거나 외면할 때 이들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 민성호 연세대 원주 의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사람의 얼굴이 제각각이듯 자살 신호도 천차만별"이라며 "'죽고 싶다'고 말하는 것 등의 널리 알려진 신호 이외에 자살자 각각이 보낸 신호를 최대한 많이 알아둬야 앞으로 일어날 자살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 치매 증세 보이고 표현 짧아져

 

강모 씨(35)는 자살하기 일주일 전 은행 현금인출기 앞에 한참을 서있었다. 평소 일상적으로 하던 현금 카드로 돈을 인출하는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결국 줄을 서서 기다리던 다른 사람이 대신 돈을 뽑아줬다. 강 씨 어머니는 "애가 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강 씨가 일상적으로 하던 일을 수행하지 못해 헤맨 건 자살 계획에 지나치게 몰입해 있다는 신호였다. '죽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인지력이 떨어져 치매 초기와 같은 퇴행 증세가 나타난다. 자살에 임박할수록 현실 감각이 무뎌져 자살 생각 외에는 아무 일도 못하게 되기도 한다.

 

자신의 심경을 구체적인 말 대신에 추상적인 말로 짧게 표현하거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늘어놓는 것도 벼랑에 내몰려있다는 신호다.

 

한모 양(19)은 자살 3일 전 아버지와 통화하며 "어떡하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많이 했다. 평소 "동기 남자 아이들이 다 군대에 가고 주변 사람이 다 떠나가 슬프다"며 구체적으로 말하던 것과는 달랐다.

 

김모 씨(33)는 형제들 사이에서 글을 논리적으로 잘 쓰고 말도 논리정연하게 잘 하는 것으로 평가 받아왔다. 그런 그가 자살하기 한 달 전부터 형제들에게 독해가 불가능한 수준의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전화 통화를 할 때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횡설수설해 형제들은 그의 전화를 수신 차단해 놓았다.

 

이는 힘든 마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끼는 단계까지 왔음을 알리는 것. 자살을 앞둔 이들이 말없이 펑펑 울기만 하는 것도 같은 이유로 분석된다. 구체적인 설명을 통해 아픔을 공감 받고 싶은 의지마저 없어졌다는 것으로 희망의 끈을 놓았다는 방증이다.

 

● 죽음을 담은 말

 

"우리 친척 중에 벽제화장터에서 화장한 사람 있어요?" 정모 씨(26)는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는 "없다"라고 답했다. 두 달 뒤 그는 자살했다. 그는 부모에게 한 번도 "죽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김모 씨(27)는 자살하기 몇 달 전 어머니에게 "노인들은 살날이 얼마 안 남아서 부럽다"고 흘리듯 말한 것이 신호의 전부였다.

 

이미 자살 계획이 확고한 이들은 "죽고 싶다"는 직접적인 감정 표현보다 죽음을 암시하는 간접적인 질문이나 말로 자살 계획을 알리는 경향이 있다. 궁금해서 그런다는 듯 불쑥 "자살한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어요?"하고 묻는 식이다. 자살 계획을 들키지 않으려 감정을 감추고 일상적인 대화를 가장해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흘려버리기가 쉽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계획 중인 자살 방법에 대해 우회적으로 언급하기도 한다. 40대 여성 이모 씨는 자살 보름 전 남편, 아들(2)과 TV를 보다 아들에게 말했다. "OO야, 저거 재밌겠다. 너도 곧 저거 탈 기회가 있을 거야." TV에서는 누군가 패러글라이더를 타고 낙하하고 있었다. 보름 뒤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이 씨는 아파트 15층에서 아들을 안고 투신했다.

 

자살 계획이 비교적 확고한 이들마저 약하게나마 신호를 보내는 건 살고자하는 본능이 무의식적으로 표출된 결과다. 자살 직전까지 살고자 하는 본능과 죽고자하는 욕망이 뒤엉켜 본능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우회적인 말 안에는 '진짜 의미를 알아챈 뒤 빨리 도움을 달라'는 소극적인 호소가 담겨 있다.


● 그가 긍정적으로 변했다면

 

자살 신호 중 가장 알아차리기 힘든 건 긍정적인 행동 변화다. 평소 설거지를 하지 않던 남편이 갑자기 설거지를 하는 식의 변화는 언뜻 긍정적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주변 사람들은 이것이 '이상한 신호'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안심하기도 한다.

 

낭비벽이 심하던 김모 씨(53)는 자신의 신용카드를 빼앗으려는 아내와 자주 갈등을 빚었다. 그런 그는 자살 3일 전 신용카드를 모두 아내에게 줬다. 평소 초코파이 7개를 한 번에 먹을 정도로 군것질에 집착하던 김모 씨(56)는 자살 한 달 전 군것질을 끊었다. 뇌수술 후유증을 앓던 그는 군것질을 끊으면서 혈색이 좋아졌다.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기력도 회복했다. 얼마 뒤 그는 회복한 기력을 자살하는 데 썼다. 가족에게 돈을 쓰는 데 인색하던 이가 갑자기 외식을 시켜주거나 평소 사진을 찍지 않던 이가 가족사진을 찍자며 먼저 나서기도 한다.

 

자살하려는 이들은 자신이 죽은 뒤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기억할지 고민한다. 손석한 연세신경정신과 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은 "자살 전 행동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건 타인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길 바라는 마음에 따른 것으로 삶을 차분하게 마무리하고 있다는 신호"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