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네안데르탈인의 슬픔 (5) 본문
(5)
점심을 먹고 편의점에 들렀다. 계산대에 사람이 없어 둘러보니 직원인 듯한 젊은이가 진열대에서 물건을 골라내고 있었다.
“여기 담배 주세요. ……뭐해요?”
“유통기한 지난 것들을 빼고 있어요. 뭐 고르셨어요?”
유통기한……. 사는 사람은 기한 넘은 물건을 안 사면 되지만, 파는 사람은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한다. 반품하거나, 폐기하거나, 아니면 드물겠지만 속여서 팔거나. 마음이 멀었던 사람이야 세상 떠난 이에게 관심을 안 가지면 그만이지만, 가까웠던 사람은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 한다. 어느 종교 사원에서 좋은 세상으로 가기를 빌거나, 죽으면 다 끝이라며 술이라도 퍼 마시거나, 아니면 사람들 앞에서 지극히 사이가 좋았던 것처럼 추억하며 위로를 받거나. 그러고 보면 우리는, 적어도 나는, 반품, 폐기, 사기까지 적당히 셋 다 한 셈인지도 모른다.
사무실로 들어오는데 막내 직원 Y가 고개를 푹 숙여 긴 머리만 보였다. 조그만 회사라 어느 직원 하나의 변동도 공기 중에 묘한 틈을 만들었다. 나는 벌써 뿌옇게 돼버린 비상계단 구석의 작은 창문을 열며, 식후에 담배까지 피우고 뿌듯해 하는 사람들에게 Y한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다.
“친구가 오늘 새벽에 교통사고로 죽었다내요. 정말 가까운 친군데 괴로운 일이 있었나 봐요. 새벽에 전화해서 이제 괜찮다고, 생각 정리해서 올라갈 거라고 했다는데…….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하네요.”
그러고는 오늘 휴가를 내려고 새벽부터 나와 일을 보았다고 덧붙였다. 이 정도에서만 멈춘다면, 이럴 때 윤팀장의 오지랖은 정말 따듯한 관심이다. 얼마 전엔 책상 앞을 지나가는 나를 불러, “이사님, 이것 좀 보세요. 귀엽죠?”하며 지난 주말에 찍었다는 자기 조카들 사진을 열심히 보여 주던 그였으니까. 물론 나야 이제 일 년이 되어 간다고 남의 애들 사진을 보고 이쁘다 할 마음은 아예 없었지만.
한참 친구 좋아할 나이에, 죽기 전의 마지막 전화를 받은 셈이니 무척 힘들겠구나 싶었다. 자리에 돌아와 메일을 짧게 썼다. 나도 그 일 이후에 가장 듣기 싫은 말이었지만, ‘힘내라’는 이 말밖에 해 줄 말이 없다고. 그리고 노래를 두어 곡 첨부했다. ‘……보고 싶은데 그것뿐인데……’ 그래, 더 이상 필요한 말은 없을 것이다. 눈이 자꾸 껌벅거렸다.
오후에는 전 직원을 상대로 제품 특성에 대한 세미나를 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그녀였다. 무시한 채 계속 설명을 해 나갔다. 휴대폰은 줄기차게 계속 울렸다. 다 같이 저녁을 먹으러 나가면서 휴대폰을 열었다. 이미 문자 메시지가 여러 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불쌍한 찌질아 네 그릇만큼 살고 있더군. 앞으로 네 집 일로 내게 내 남편에게 연락마라.’
‘팔순 노모도 안 모시면서 뭐 양심을 운운해? 노모 왈 내가 오죽하면 하나 자식하고 안 살겠나~_~ㅋㅋ’
역시 그녀답게 하룻밤을 보낸 후에 가만있지 않았다. 어머니 팔순이 내 집만의 일? 맨 끝의 웃는 이모티콘, 그리고 ‘ㅋㅋ’……. 다들 기다리고 있을 식당 앞에서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허허 웃으며 살고 있어야 했나? 아무리 독한 말을 퍼부어도 기분 좋게 비용이라도 죄다 계산해야 했나? 어머니도 이젠 당신만을 위해 주변을 틀어놓는 게 지겹지도 않을까? 하늘은 왜 답답할 때, 억울할 때 쳐다보라고만 있는 걸까……. 담배를 피운 지 20년이 훌쩍 넘었건만 머리가 띵해졌다. 연기는 원망과 분노로 응어리진 가슴에서 나왔어도 여느 때처럼 그냥 허공 속으로 흩어져 갔다.
결혼 전만 해도 어머니와의, 그녀와의 관계는 평균보다 지극히 좋았었다. 형님이 돌아가신 후에 나는 넘치는 관심 속에서 살았고, 나 또한 형의 몫까지 매사에 고려하려고 애를 썼었다. 이러던 모자 간에 최초의 틈이 보인 건,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1년이 지났을 때였다. 금리 높은 상품이 나왔다고 통장을 달랬더니 갑자기 나를 도둑놈 취급하셨다. 결혼 후에는 이런저런 갈등으로 야밤에 랜턴 들고 야산에 오르기도 했고, 결국 박사학위 수여식 날에는 학교에도 가지 않고 혼자 한강 유람선에서 타는 속을 식혔었다.
딸아이가 여름에 태어나고 한 달 후에 그 사실을 알았다. 의사가 그 해를 못 넘길 수 있다고 하는데도 어머니는 너무 담담하셨다. 큰아드님을 잃었던 경험자로서 우리가 약해질 걸 염려하신 줄 알았는데, 결코 그것만은 아니었다. 잠 못 이루는 딸아이를 밤새 안고 어르다가 겨우 잠든 아내를, 하늘에서 시어머니 심술이 내려 왔는지 이른 아침부터 TV 소리를 키워 깨우곤 하셨다. 딸아이가 왜 그렇게 예민한지 뻔히 아시면서도 아이를 타박하기도 하셨다. 난 결국 꿈에도 상상하지 않던 분가를 했다.
그녀의 경우는 한마디로 황당했다. 내가 대덕연구단지로 내려온다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전화를 걸어 병신 같은 놈, 대전에 왜 내려오느냐고 했던 사람이다. 어느 날은 연구소로 전화를 걸어와 병신같이 아들도 못 낳느냐고 하더니만, 드디어 아내와 언쟁 중에 딸아이를 병신이라 불렀던 모양이다. 아내와는 물론, 며칠 후에 나하고도 한바탕을 하고는 거의 연락 없이 지내게 됐다. 언젠가 그 일을 얘기하니 자형은 싸우면 무슨 말을 못 하겠냐고 했었다. 그래도, 비록 싸우면 해도 되는 말의 수준은 분명 넘어섰지만, 남매의 끈을 아주 놓아 버리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지극히 다정했던 남매가 어찌 이렇게 되었을까, 졸업논문 쓰라고 포대기에 잠투정하는 조카를 들쳐 업고 발코니를 왔다 갔다 하던 남동생에게 어찌 이런 행짜를 부리게 되었을까? 그것 때문일까? 더 가져가래도 그거면 됐다고, 아버지께서 살아 계셨어도 더 주지는 않으셨을 거라고, 제 입으로 버젓이 말해 놓고는.
그녀는 딸아이가 입원한 석 달 동안 전화 한 번 주지를 않았다. 어머니를 통해 수술을 받는다는 말을 들었을 텐데도, 쌍꺼풀 수술이 아닌데도, 한마디 말이 없었다. 딸아이가 떠났다고 전화를 걸었을 때도 그녀는 넌 왜 그렇게 운이 없니?, 라고 했다. 그리고 자형이 출장 중이어서 아무도 갈 수 없겠다고 뒤를 이었다. 멀쩡히 부모 손잡고 들어간 조카가 삼 개월이나 모진 고생을 하다가 다시는 못 보게 되었는데도, 그저 ‘넌 왜 그렇게 운이 없니?’ 한 마디였다. 그래도 그런 그녀에게 어머니가 충격 받으실지 모르니 신경 써 달라고 부탁할 만큼, 전혀 불필요한 걱정을 할 만큼 나는 여전히 어리석었다.
그런데 몇 달 후에 큰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집으로 전화를 걸어온 모양이다. 당연히 조카의 죽음에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큰어머니의 부고에 호들갑떠는 시누이와 아내는 한판 붙었을 것이다.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하더라도, 큰어머니와 그녀, 딸아이와 그녀가 같은 촌수임을 고려할 때, 적어도 비슷한 반응은 보였어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고등학교 시절에 벌써 자기 문제집을 풀던 중학생 동생이 서울에서 ‘성공’해 있기를, 그래서 보란 듯이 여기저기에 친정 자랑 하기를 원했을지 모른다. 감기만 좀 심해지면 바로 폐렴으로 가는 딸아이 때문에 노심초사하던 아내를 유난떤다며 짜증스런 얼굴로 바라보던 그녀였다. 그렇다고 집안에 가득한 남녀 불평등으로 자아실현과 성공을 못 하게 한 것도 아니고, 동생 때문에 동분서주하게 한 일도 없고, 조카 입원비에 돈 한 푼 보태게 한 적도 없는데……. 돈, 자식, 남편을 화두 삼아 세속에서 매진하는 그녀에게 우리의 삶 자체가 괴변이었나 보다.
같은 죽음을 겪었지만 그녀와 나는 달리 살아온 모양이었다. 형이 마지막으로 뛰었을 연병장이 집 근처에 있었다는 걸 알고 있을까? 지금은 동작동 오빠의 무덤을 찾아갈 수나 있을까? 물론 인터넷으로 모든 걸 조회하는 세상은 혹시 느낄지 모르는 미안함조차 뺏어갈 테지만.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보다도 자식 잃은 마음을 이해하실 당신께서, 그 일로 아들 부부가 이민이나 가버리지 않을까, 이혼이나 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계셨다. 당신의 노후가 걸린 일이니까. 아무리 뭐라 해도 딸보다 만만한 아들이고, 딸보다 관심 갖고 자기를 돌볼 며느리니까.
우리는 단지 조용히 있고 싶은데, 남들은 우리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아니, 그들이 우리에게 혹시라도 기대했을 이익을 전혀 실망시키지 않고 살아가길 원하나 보다. 오로지 모든 관심은 생존, 그놈의 생존, 그리고 그것에 보탬 되는 것.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생존을 내려놓고, 보탬 되는 것조차 하나 챙기지 못하고, 어떻게 모두 떠나기는 하는 걸까. 수리부엉이보다, 네안데르탈인보다, 인류가 진화하기는 한 것일까.
젊은 사람들끼리 2차를 보내고 평소보다 일찍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처조카에게 준다고 딸아이가 쓰던 물건 몇 개를 챙기고 있었다. 12년을 하루같이 초인적인 정성을 쏟은 어미. 내가 아무리 힘들다 해도 아내의 만분의 일일 것이다.
나는 딸아이의 지문이 남아 있을 전자수첩을 받아 들고 컴퓨터에 연결했다. 다행히도 입원 전에 선물로 받고 좋아하며 녹음했을 노래 하나가 조심스레 들어있었다.
“……반가워 웃으며 아빠, 하고 불렀는데 어쩐지 오늘 아빠의 얼굴이 우울해 보이네요. 무슨 일이 생겼나요? 무슨 걱정 있나요? 마음대로 안 되는 일 오늘 있었나요…….”
무슨 일인지 뻔히 알 텐데, 녀석은 여기까지만 부르고, 별일 아닌 듯 멀리멀리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