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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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섭 칼럼] ‘자아 죽음(self-death)’인가, ‘자아 죽임(self-killing)’인가?
크리스천투데이 | 2017.10.27 15:52
기독교에서 '자아 죽음(self-death)'처럼 왜곡되는 경우도 흔치 않습니다. 흔히 여기에 동원되는 성경 구절들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갈 2:20)'.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입니다. 수양 종교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들에서 '나를 죽여 없는 것처럼 만든다'는 불교의 자아 멸상 같은 것을 떠올리고, 경건주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경건 훈련의 근간을 봅니다.
자신들의 최고 이상을 인류애의 공헌에 두는 박애주의자들은 '이타주의'와 동일시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옛날 어머니들이 모진 시집살이를 견디려고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으로 죽었다 하고 살자'고 했듯,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살아남는 비책쯤으로 간주되곤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계 안에서 널리 회자되는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자기 비움', '자아 죽이기', '내려놓음' 등은 모두 '자아 죽음(self-death)'의 왜곡에서 파생된 부산물들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자아 죽음(self-death)'은 종교 수양의 방편이나 이타주의 혹은 시련기의 처세술로서가 아닌, 그리스도의 구속사(救贖事)적 측면에서 파악돼야 합니다. 한 마디로, '자아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을-나를 대신한 죄 값으로-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전적 타락한 죄인의 죽음은, 율법이 요구하는 죄 삯이(롬 6:23) 못 되기에,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죄삯으로 취해 하나님 앞에 내어놓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아 죽음(self-death)'은 흔히 생각하듯 고도의(?) 경건 행위로서 '자아 죽임(self-killing)'이 아니라, 나를 대신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이 되는 첫걸음입니다.
시제(時制)상으로도 현재완료형의 '자아 죽음(self-death)'은 현재진행형의 '자아 죽임(self-killing)'과 구분되며, 태형(態型)상으로도 구별됩니다. '자아 죽음(self-death)'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삼는 사역형(make killing mine)이라면, '자아 죽임(self-killing)'은 내가 나를 죽이는 1인칭 재귀형입니다. 이처럼 현재 완료형, 사역형으로 된 '자아 죽음'의 시제와 태형을 보더라도, 그것이 인간이 현재적으로 만들어내야 하는 경건 행위가 아님을 증거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여 그의 죽음과 연합하면, 그의 죽음과만 연합되지 않고 그의 생명과도 연합되어 그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가 내재하시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죽음의 먹힘(being eaten)'을 통해 우리 안에 내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먹힘(being eaten)'을 통해 이루어지는 이러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내재)은, 신비주의자들의 고도의(?) 경건 행위인 '신인합일(unification with god)'과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교회사에서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내재)'을 도모하던 사람들이 자주 오류에 빠졌던 것은 그것을 신비주의의 '신인합일(unification with god)'로 곡해한 때문 입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예수 이름으로 고쳤을 때 베드로의 경건으로 고친 것처럼 사람들이 그를 주목했듯이(행 3:12), 신비주의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도모할 때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아 죽음(self-death)'에 주목하기보다는, 인간 경건인 '자기 죽임(self-killing)'에 주목함으로써, '신인합일(unification with god)'로 흘렀습니다.
동서양에 많은 독자들을 거느린 토마스 아 캠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의 경건주의의 고전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 Christi)> 역시 경건의 핵심을 '금욕'과 '자아 죽임'에 두고, 이를 통한 '신인합일(unification with god)'을 추구했습니다. 이처럼 '자아 죽음'의 개념이 바르게 정립되지 못할 때, 그 열매인 그리스도와의 연합(내재) 개념도 바르게 정립되지 못합니다. 이런 점에서 '자아 죽음(self-death)'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기독교의 핵심 사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내재)는 '자아 죽임' 같은 고도의 경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므로 이루어진다고 말씀합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 예수님의 포도나무 비유에서도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내재)을 상징하는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음'과 '그리스도 안에 거함(요1:54)'도 믿음, 곧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임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아 죽음(self-death)'이 고도의 경건행위로서의 '자아 죽임(self-killing)'으로 곡해될 때, 필연적으로 영적 계급주의(Hierarchism)가 파생됩니다. 초고도의 '자아 죽임'에 도달한 사람은 소위 성자 반열에 편입되고 '자아 죽임'에 실패한 사람은 저급한 교인으로 치부됩니다. 중세 교회에서 성자로 추앙받는 많은 사람들은 대개 이 기준이 적용된 듯 하며, 금욕주의와 수도원 창궐 역시 이 '자아 죽임'에 도달하려는 몸부림으로 보입니다.
'자아 죽음(self-death)'을 '자아 죽임(self-killing)'으로 곡해할 때 생겨나는 또 하나의 폐단이 화목 교리의 곡해입니다. 주지하듯 화목은 칭의와 더불어 하나님과의 관계를 결정짓는 중요 교리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멈추고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있게 만듭니다. 본래 성경적 개념의 '산다'는 말은, 독립된 개체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산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죄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개체적으로 살게 된 인간은 사실 삶이 아닌 죽음을 살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그는 죽었지만, 그의 육신은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에덴동산에서 일상을 영위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아담을 살았다고 하지 않고 죽었다고 했습니다(고전 15:22; 롬 5:17). 하나님은 그렇게 그와 단절됐던 우리를, 화목제물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과 화목시켜, 하나님을 향해 살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자아 죽음(self-death)' 곧 화목제물이신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므로서가 아닌, 자신들의 경건 행위인 '자아 죽임'을 통해 유지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경건주의자 신비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하나님과의 화목의 원천을 그리스도보다는, 자기 경건에 둡니다. 즉 끊임없이 자기를 죽이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화목이 유지된다고 봅니다.
이러한 화목 개념은 칭의유보자들의 관계적 칭의론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데,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화목이 자리 할 곳이 없게 됩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