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죽은 시계가 하루에 두 번은 맞듯... 본문
2009년에 쓴 소설이 있었다. 마지막 선택...
문득 떠올라 마지막 부분을 읽어보려고 하는데 전자책 뷰어가 말을 안 듣는다.
너무 오랜만이기도 했지만, 전자책은 이런 게 문제라는 생각이 앞선다.
그래... 내가 쓴 글이었나 보다.
아무리 물이 뜨겁게 끓어도 그 컵이 더 튼튼함을 믿는다.
201○년 봄
“……세계 보건당국의 우려가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몇 년 전에 유행했던 신종 인플루엔자처럼 전염성이 강하면서 조류 인플루엔자처럼 치사율이 높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될 경우 수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지난 1918년 스페인 독감을 능가하는……”
차부장은 자꾸 라디오 뉴스에 신경이 씌었다. 연일 뉴스에서는 외국에서 일어나는 집단 감염, 휴교, 사망 등의 불길한 소식만 전하고 있었다. 항생제에 내성이 생긴 탓인지 바이러스들은 꿈쩍도 않는 것 같았다. 이미 사람들은 괴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일부 신흥종교에서는 인류의 종말이 다가왔다고 구원을 위해 자기들한테 오라고 연일 신문광고를 내고 있었다.
늦은 나이에 초산인 아내는 산부인과에서 퇴원을 하고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백미러에 보이는 아내는 뉴스를 들으며 수심이 가득했다.
“상황이 더 나빠지나봐. 나야 애하고 집에 있지만, 자기는 조심해라. 사람 많은 데 가지 말고.”
그래도 그는 아내의 팔에 안겨 쌔근쌔근 잠자고 있는 아기를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번 괴질처럼 속도가 빠르면 정말 별수 없을 것 같애. 항생제 남용에 대한 벌을 받고 있는 건가? 그렇다고 출근을 안 할 수도 없고. 우리나라도 곧 시작될 것 같은데……. 아니, 이제 겨우 노총각이 결혼하고 우리 애가 태어났는데 세상이 이러면 어떡하나?”
“어제 좌욕실에 앉아 있는데 어떤 엄마가 그러더라구. 어느 종교에서 그랬대, 말세에는 괴질이 돈다구. 그것도 밤중에 도둑 들듯이 갑자기. 부모가 자식 챙길 겨를도 없이 사람들이 마구 죽어 나갈 거라고 했대. 모두들 소름끼친다고 그 엄마한테 막 뭐라고 했지. 다들 내 아기는 내가 꼭 지킬 거라고.”
“말세가 지진이나 이상 기후로 오지는 않나 보지?”
“그러면 인간 말고 다른 생명들도 다치잖아. 말세는 인류가 받는 심판이래요.”
차부장은 심각한 얘기 끝에 웃고 말았고, 아내는 사랑이 가득 담긴 눈길로 아기를 바라보았다.
“참, 자기 저녁에 약속 있다고 했지?”
“응. 진박사님이 한턱내라고 하시네. X 원장님도 함께 오신다고.”
“그래, 돈 아끼지 말고. 그리고 진박사님 앞에서 눈치 없이 아기 얘기하지 말고.”
“아참, 내가 바보인가? 딴 분도 아니고…….”
차부장은 스페이스타임을 그만둔 이후 진동욱과 같이 일할 기회가 있었고, 그 후로도 계속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다.
괴질에 관한 소식 말고 중요한 뉴스는 없는 듯했다. 주말부터 서울에도 벚꽃이 만개할 거라고, 다음 주에는 황사도 없겠다고 했다. 잠깐 사이에 아내는 잠들어 있었다.
“……A대학 이모 교수는 B사로부터 국책연구사업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청탁을 받고 수차례에 걸쳐 수 억여 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이교수는 지난달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자 잠적한 뒤 지난 1일 인천공항에서 체포됐습니다. ……수사 관계자는 달아난 전 S사 대표 석씨와 관계자 신씨에 대해서도…… 신씨는 석씨가 이교수에게 전달하라고 준 돈을 수차례 중간에서 빼돌린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차부장은 혹시 자신이 아는 사람들일까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필이면 만우절에 잡혔네. 그 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먹지는 못했을 테고…….’ 그는 혼자 키득거렸다.
그러고 보니 일주일 내내 뿌옇던 날씨가 거짓말같이 맑아 있었다. ‘화창한 봄날’이라는 말 그대로였다.
‘그래. 인류가 어떻게 죽을 둥 살 둥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괴질로 사라지면 억울하지. 암, 억울하고말고. 제대로 된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다 가야지.’
차부장은 뉴스를 들으며, 가끔 아내와 아이를 돌아보며, 이따금 혼자서 키득거리며, 집으로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