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신앙감정론 - 2부 소극적 표지들 (Religious Affections, 조나단 에드워즈 | 존 스미스 | 정성욱) 본문
제 2부 신앙감정이 진정으로 은혜로운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 근거가 될 수 없는 표지들
1. 첫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강도
- 그리고 이전처럼 예수님을 향한 무리들이 크게 외쳤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종류의 외침이었다. 그것은 '호산나, 호산나'가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이었다. (198쪽)
2. 두 번째 소극적 표지: 몸의 격렬한 반응
3. 세 번째 소극적 표지: 신앙과 신학에 대한 관심
- ...때로는 '어떤 사람도 이 사람과 같이 말한 사람은 없다' 라고 열정적으로 진지하게 외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행동들의 결과는 어떠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국 그리스도를 버리지 않았는가? (207쪽)
4. 네 번째 소극적 표지: 감정의 자가 생산 여부
- ...조용하고, 비밀스럽고, 점진적이고,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인 능력이 분명하게 드러나서 놀랍고도 갑작스럽게 크게 변화된 것이었는데 요즘은 이런 것들은 속임수와 지나친 열광주의의 분명한 표지로 여겨지고 있다. (212쪽)
- 또한 사단의 능력은 공포와 두려운 생각을 심는 일에서만큼 거짓된 기쁨과 위로를 주는 일에서도 즉각적이고 분명하게 나타난다. 독일의 재세례파들과 많은 다른 열광주의자들이 경험했던 황홀한 기쁨은 사람의 능력으로 민들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214쪽)
5. 다섯 번째 소극적 표지: 성경이 갑자기 떠오름
- 마귀는 성경 본문을 마음 속에 생각나게 할 수 없으며, 사람들을 속이기 위해 그 말씀들을 잘못 적용할 수도 없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이런 일을 하는 데 사단의 능력을 능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218쪽)
6. 여섯 번째 소극적 표지: 사랑의 피상적 표현
- 사단의 교묘함과 사람에게 있는 기만성은 최고의 영예를 누리는 이런 미덕들과 은혜를 모방하는 데 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과 겸손보다 더 많은 모조품을 가지고 있는 은혜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222쪽)
7. 일곱 번쨰 소극적 표지: 감정의 정도
- 홍해에서 하나님께 찬송을 불렀던 이스라엘 자손들과(시106:12), 문둥병이 치료되는 기적을 체험한 앗수르의 나아만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에서도 모조품이 있다. (224쪽)
8. 여덟 번쨰 소극적 표지: 감정의 체험순서
- ...믿음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들이 체험하는 위로와 기쁨의 감정이 아주 두려운 근심과 번민 후에 생겼다는 사실을 가지고서 그 감정들의 진실성과 영적 본질을 반대하는 이유를 내세우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것 같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위로와 기쁨이 큰 공포와 지옥에 대한 놀라운 두려움에 뒤이어 왔다는 것이 반드시 그 위로와 기쁨이 바른 것이라는 증거는 아니다. (235쪽)
- 경험상 우리는 최고의 그리스도인들에게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과 그리스도인들의 회심 과정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헤아릴 수 없고, 추적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하나님의 성령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틀에 짜여진 방법으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다. (243쪽)
9. 아홉 번쨰 소극적 표지: 종교적 행위와 의무의 피상적 실천
- 그것은 헤롯 왕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세례 요한의 설교를 기쁨으로 들었다. (막6:20, 247쪽)
10. 열 번쨰 소극적 표지: 찬송을 열심히 부름
11. 열한 번쨰 소극적 표지: 자신의, 구원 확신
- 이와 같은 고자세로 과도하고 격렬하게 확신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눈에 아주 화려하고, 감동적인 것으로 보이더라도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있는 확신의 모습은 아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이 보여 준 태도를 더 풍긴다. (257쪽)
- 위선자들은 두 부류가 있다. 종종 후자가 더 나쁘다고 말한다. (셰퍼드 목사, 260쪽)
율법적인 위선자: 그들 자신 밖으로 드러나는 도덕성과 외형적인 신앙에 기만당하는 부류다. 이 부류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칭의 교리에 있어서 고백적인 알미니안주의자들이다.
복음적인 위선자: 거짓된 깨달음과 고상함에 기만당하는 부류다. 이 부류에 속한 사람들은 종종 행위와 인간 자신의 의를 폄하하며, 대가 없는 은혜를 많이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자신들의 깨달음과 겸비함을 의로움으로 삼고, 자신들을 하늘에까지 높인다.
- ...이성이나 일어나는 사건들이, 그들이 바라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임을 강하게 암시함에도 불구하고,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아주 우스울 정도로 확신하게 되었다. 자신들이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거짓된 감동들에 기만당하여, 이런 식으로 확신을 하게 되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다. (261쪽)
- ...그리스도인들은 눈으로 봄으로써 사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 그리스도인들은 삶의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 그리스도인들은 체험에 의지하지 않고 (체험을 자신의 의로 삼지 않고, 270쪽) 그리스도께 의지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 자신들의 선한 삶을 믿음의 토대로 삼지 않아야 한다는 것 등이 있다. (262쪽)
12. 열두 번쨰 소극적 표지: 타인에 의한, 구원의 확신
- 독자들이여, 당신은 유다와 데마와 아나니아와 삽비라, 후메내오와 빌레도와 같이 한때 저명하고 유명했던 신앙인들을 안다. 그리고 당신은 그들이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도 안다. (Flavel, 273)
- 나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신실함을 판단하는 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다음 원리보다 더 명백한 지침이나 조언은 알지 못한다. 즉 그 원리는 나무를 그 열매로 판단하라는 것이다. (276쪽)
- 위선자들에게서, 우리는 영적이고 매우 현명한 눈으로 봐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구원하시는 참된 은혜라고, 쉽게 오해하게 만들 법한 비슷한 역사들을 발견한다. (2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