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이재근) - 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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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이재근) - 2

조용한 3류 2023. 9. 26. 13:50

우연히 접한, 연재기사(뉴스앤조이)들인데, 그냥 흘려보내기 너무 아깝다.

읽은 후에 기사 링크를 하나씩 올리기로 했다.

 


8.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아버지  (연재 이재근 2018.11.28 13:22)

- 1492년 이래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시행한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착취형 선교에는 이면도 있었다. 성경에 기반하고, 선교사의 모델인 사도 바울이 구현한 참선교를 실천하기 위해, 피선교지 사람들과 같은 수준으로 가난하고 단순하게 살면서 동일시(identification)의 모범을 이루려 노력한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예수회 수도사들의 헌신도 있었다. 영화 '미션'에 나오는 예수회 신부 가브리엘이 보여 준 것이 바로 이런 이들의 선교 전형이었다.

 

- 구티에레스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가난한 자들이 선취권을 갖는 것이 마땅한 것은 그들이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다른 이들보다 더 낫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나중 된 자가 먼저 된 자'로 보이기 때문이다.

-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동반하고 섬기기 위해 그들에게 가까이 갈 때, 우리는 우리처럼 가난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형제가 됨으로써 우리에게 가르친 바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는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일에 유일한 요소는 아니지만 우선적 요소이다.


- 해방신학의 기여로 인식될 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자와 그들이 처한 현실의 구체성에 대한 관심이 없는 신학은 불완전하다. 둘째,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관심을 상기하여, 교회가 이 문제에 다시 천착하게 했다. 셋째, 구원이 영적이거나 교회적인 것만이 아니라, 영육, 지정의를 포괄하는 전인적인 것이며, 교회와 사회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해방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넷째, 신학이 단순히 바른 이론으로만 존재해서는 안 되며, 삶의 구체적이고 어두운 현실을 바꾸는 바른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 그러나 이 신학은 다음과 같은 비판도 받았다. 첫째, 우선 가톨릭교회(바티칸 신앙교리성)에서 내린 공식 비판이 있었다.

: 1984년 9월,  첫 번째 교시, '자유의 전갈: 해방신학의 일부 측면에 대한 훈령' 

: 1986년 4월,  두 번째 교시, '자유의 자각: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해방에 관한 훈령'

 


9.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미국 흑인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비폭력 저항 민권운동의 모세  (연재 이재근 2019.02.20 15:07)

-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in Luther King, Jr, 1929~1968)는 39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가 결국은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아마도 당대 백인 사회에서 노예제의 반기독교성과 비인간성을 지적한 거의 유일한 집단은 메노나이트나 퀘이커 같은 재세례파 계열의 공동체였던 것 같다. 이들은 산상수훈의 황금률, 즉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을 근거로 흑인 노예 편에 섰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데다, 사회적으로도 고립주의의 길을 걸은 이들의 목소리는 당대에 거의 영향력이 없었다.

-냇 터너(Nathaniel 'Nat' Turner, 1800~1831)의 반란이 바로 농장주들이 우려한 그 실례였다. 어릴 때부터 읽고 쓰기를 깨친 노예였던 터너는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으며 개종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 농장주의 허락하에 동료 노예들에게 주일과 여러 행사에서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어, 동료 흑인들에게는 '예언자'로 불렸다. 그러나 "주인에게 순복하라"는 메시지를 주로 전하여 고분고분한 노예가 되기를 원했던 노예주들 바람과는 달리, 그는 신구약 성경에서 속박과 압제에서 해방된 유대인과 기독교인에 대한 메시지를 더 많이 발견했다. 더구나 환상을 자주 보았기에, 결국 자신에게 임한 묵시를 압제받는 자기 민족의 해방을 명령하는 계시로 해석했다.

-남부 기독교인은 노예제를 성경적으로 변호하는 독특한 논리를 만들어 냈다. 첫째, 노예제는 흑인이 안정된 질서 속에서 백인의 기독교 신앙과 개화한 문명을 배우는 특권적 제도다. 둘째, 북부의 노예제 비판은 성경적이거나 건전한 민주주의라기보다는, 반기독교적이고 급진 계몽사상이나 무신론에서 유래한 세속적인 인권 주장이다.

-남북전쟁은 외적으로는 둘로 분리된 나라가 맞서 싸운 정치적 내전이지만, 내적으로는 종교전쟁의 특징이 다분했다. 양편 다 자신들이 종말론적 성전을 치르고 있다고 믿었고, 상대가 악의 화신이라 확신했다. 북부는 노예해방 전쟁이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남부는 북부의 세속주의를 막는다고 내면화했다.

-대통령 링컨은 이 시기 이후 미국 시민 종교의 신화적 인물로 흔적을 남기는데, 노예제, 남북전쟁에 대한 유명하고도 감동적인 종교적 수사[예컨대, "제 끊임없는 기도와 관심은 (주님이 우리 편이 아니라) 이 나라가 주님 편에 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북부 및 재통일된 연방 정부는 사악한 악의 세력을 극적으로 응징한 정의로운 십자군으로 자신을 정의했고, 남부는 패배의 경험을 참된 진리와 바른 대의를 위해 순교한 이들이 통과할 수밖에 없는 불 시험과 피 흘리는 시련의 도가니로 인식했다.

- (1955년 12월 5일)   이들은 지역 목사들과 함께 몽고메리진보협회(MIA)를 조직한 후, 이 협회 회장으로 26세의 젊은 목사 마틴 루터 킹 박사를 선출했다. 짧게 20분 동안 준비해서 행한 이날의 수락 연설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민운동가의 탄생을 알린 역사적 취임 연설이었는데, 여기서 이미 그가 기독교 신앙과 연결된 비폭력 저항 사상을 자기화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오늘 저녁,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이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폭력은 필요치 않다는 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 본 적도 없습니다. 저는 몽고메리의 구석구석에, 그리고 이 나라의 구석구석에 우리가 기독교도라는 것을 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기독교의 진리를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습니다. 오늘 저녁, 우리 손에 들려 있는 유일한 무기는 바로 저항이라는 무기일 따름입니다. 오직 그것뿐입니다."9)

- (1968년 2월)   진실은 지금도 여전히 뿌연 안개 속에 묻혀 있지만, 1968년 4월의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2월에 애틀란타의 애버니저침례교회에서 행한 설교에서, 킹은 죽음을 예견한 듯, 자기 삶과 죽음의 의미를 되짚는 연설을 했다.
"......나는 이따금 나의 죽음과 장례식에 대해서 생각하곤 합니다. 나는 죽음을 음울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따금 '내가 진정으로 듣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 하고 자문합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께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그날이 오면, 마틴 루터 킹 2세는 자신의 인생을 남을 돕는 데 바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마틴 루터 킹 2세는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내가 전쟁 문제에 대해서 올바른 태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내가 굶주린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내가 일생 동안 감옥에 갇힌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날이 오면, 내가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를 위해 봉사하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나를 군악대장으로 부르고 싶다면, 정의를 알리는 군악대장, 평화를 알리는 군악대장, 평등을 위한 군악대장이라고 불러 주십시오. 나머지 사소한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중략) 내가 기독교인의 의무를 다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가르침을 전할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헛되지 않은 것이 될 것입니다."14)

- (1968년 4월 3일)   암살 전날인 1968년 4월 3일에 테네시주 멤피스 소재 찰스메이슨감독기념교회에서 한 연설 '나는 산 정상에 다녀왔습니다'
"글쎄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저도 지금은 알지 못합니다. 우리 앞에는 다소 힘겨운 날들이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산 정상에 올라갔다 왔으니까요. 저는 개의치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도 오래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는 그것에 대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을 뿐입니다. 그분께서는 저에게 산 정상에 오르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변을 둘러본 저는 약속의 땅을 보았습니다. 아마 여러분과 함께 그곳에 가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여러분이 오늘 밤, 우리가 한 국민으로서는 그 약속의 땅에 이르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늘 밤 너무도 행복합니다. 그 어떤 두려움도 제게는 없습니다. 저는 어느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제 눈은 이미 주님께서 오시는 영광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제 분명히 입력했는데, 존 스토트 목사님 것이 없다. 태그도 입력했는데... 진실로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ㅠㅠ)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 (10)]  존 스토트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2796

- 일평생 독신으로, 교회 근처 작고 소박한 플랏에 살면서, 단벌 양복과 단벌 구두만으로 만족한 인물. 가난한 유학생과 나그네에게 자신의 주식이던 햄버거와 수프를 대접하고, 이들에게 편지를 쓰고, 함께 기도했던 인물. 진흙에 엉망이 된 친구의 신발을 닦았던 인물. 하나님의 손길이 교회와 인간에만이 아니라, 자연과 동식물에게도 미친다고 믿고, 그래서 세상의 모든 새를 찾아 헤맸던 인물...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 ⑪] 마더 테레사
'가난한 이들 중 가장 가난한 이' 안에서 예수를 발견한 콜카타의 성녀

"혈통으로 말하자면 나는 순전한 알바니아 사람입니다. 국적은 인도고요. 신분은 가톨릭 수녀입니다. 소명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전 세계에 속해 있습니다. 마음에 관해 말하자면, 나는 온전히 예수님의 마음에 속해 있습니다."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⑫] 가가와 도요히코 : 빈민 구제와 협동조합 운동을 이끈 평화의 사도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3444

- "로건 박사와 마이어스 박사의 가정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것은 비단 성서만이 아니다. 이들 두 가정이 보여 준 사랑이었다. 싸움에 지쳐 갈 곳이 없을 때, 이 두 가정은 언제든지 나에게 열려 있었고, 날 기쁘게 맞아 주었다. 그들은 나를 마치 자신들의 자식 가운데 한 명인 것처럼 보듬고 키워 주었다."

- "그리스도교 지도자 가운데에는 우리가 경제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것이 영적이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예수는 이 땅에 육체를 입고 오신 분이다. 그의 육화肉化는 그 자체로서 놀라운 신 존재의 명백한 현상이었다. 우리의 육체가 신 의식에 의해 지배될 때, 신의 율법은 물질적인 요소들 안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결국 경제도 신의 율법에 따라 지배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경제적 측면에도 적용된다."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는 어떠할까? 서구가 2000년 동안 지켜 왔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교, 그 순수한 정신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점점 악화되고 있다. 하지만 이 종교는 오히려 그 태어난 고향인 이곳 동양에서 부활의 가능성을 찾고 있지는 않을까? 이러한 이유로부터, 가가와 씨나 간디를 향한 서양인들의 열렬한 흠모와 숭배의 현상이 나타났다. 그것은 결국 서양인들의 자기부정에서 비롯된 산물이며, 우월감의 꿈에서 깬 백인종의 신음 소리라고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

- 1940년 10월에 가가와는 지금까지 자신이 정부에 대항하는 활동을 한 것을 반성하는 공식 참회문을 게재하고, 천황에 대한 경의를 표하며,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맡은 신적 사명을 지지하는 내용을 잡지에 기고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에는 미군이 전장에서 일본군 및 일본군 시체를 대상으로 벌인 잔학 행위나 미국의 전반적인 인종차별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전쟁은 이렇게 세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였던 가가와를 민족주의자이자 전쟁주의자로 바꾸어 버렸다.

- 가가와는 자신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정부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전쟁 선전에 이용당한 면이 있음을 인정한다 해도, 전쟁 말기에 그는 아시아의 유일한 희망으로서 백인 지배자들을 쫓아내어 아시아인을 해방한다는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논리에 적극 찬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 점에서 가가와는 실패한 예언자였다. 종전 직전 <Time> 기사에서 언급된 대로, "일본의 가장 유명한 기독교인은 가가와 도요히코라는 이름의 거의 눈먼 평화주의자"라는 평가도 옳았다.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⑬] 레슬리 뉴비긴복음주의적 확신과 에큐메니컬 포용성을 체화한 선교신학자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4545

 

- 뉴비긴은 한국 기독교인에게 대체로 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즉, 기독교 국가 영국 출신 기독교인으로 일평생 인도에서 선교사로 일하다가 돌아와 보니, 자신을 선교사로 파견했던 기독교 모국 영국이 다원주의적인 이교도 국가가 된 것을 애통히 여기면서, 한때 기독교 국가였던 서양 사회에 대한 역선교(reverse mission)를 주창한 인물.


- 중등학교와 대학 시절에 익힌 퀘이커 전통에 따라 평화주의 입장을 취하고 있던 그는 2차 대전 이전, 독일과 이탈리아의 움직임으로 전쟁 위협이 점점 커지던 시기에 평화주의가 일종의 도피주의로 전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즉, 낭만적 평화주의가 현실 정치를 만나면, 결국 가장 무자비한 독재자와 침략자가 마음대로 활개 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평화주의 입장을 포기했다.

- (중략) 여기에서 필요한 것은 나란히 서서 책임을 타인에게 넘겨줄 수 있는 능력이다. 즉, 그들의 리더십 역량을 키우는 일을 성공의 첫 번째 잣대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같은 일이 수행되고 있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부분적인 이유는 과로와 인력 부족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제나 의식하게 되는 문제는, 선교사 진영이 인도인들을 친밀한 교제권에서 확실히 배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 (중략) 마을에서는 이 두 단체(성공회 고교회 선교회인 SPG와 성공회 복음주의 선교회인 CMS)가 전혀 다른 종교처럼 보이곤 했었다. SPG 지역에서는 진흙으로 지은 가장 보잘것없는 채플이라도 그 제단이 온갖 장식품으로 꾸며져 있는 반면에, CMS 지역에서는 성찬대 위에 십자가만 있어도 그것을 우상숭배의 상징으로 여겼다. 그럼에도 양자는 제각기 강점을 갖고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미국해외선교회(회중교회)가 관할하는 그보다 훨씬 더 넓은 지역은 전혀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그 단체 선교사들은 미국 프로테스탄티즘 중에서도 매우 자유주의적인 진영 출신이었다. (중략) 예배는 경건하기보다는 실험적인 분위기를 풍겼고 때로는 엉성하기까지 했다. (중략) 흔히 '의장 개회사'로 시작해 '감사의 결의'로 끝났으며 성경 낭독은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교회는 예배 처소라기보다는 오히려 공동체 운동에 더 가까운 듯 보였다."18)

- "웁살라 대회는 여러 면에서 나를 산산이 부숴 버린 모임이었다. 전체 집회는 온통 경제적 불의와 인종적 불의의 문제로 채색되어 있었다. 분위기는 분노로 가득했다. (중략) 복음의 메시지는 거의 들을 수 없었다. 단, 작은 구세군 밴드가 찬송을 부를 때 그것이 무언의 소리로 들렸을 뿐이었다. 이보다 더 주목을 끈 것은 피터 시거가 기독교 복음을 조롱하는 그 유명한 가사―'당신이 죽을 때는 하늘에 파이가 있을 것이네'―가 담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었다. 모두들 입을 다문 채 열심히 그 노래를 듣다가 마치 새로운 진리가 계시된 것처럼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이들 중 일부는 소수 종교 및 인종 공동체에 속한 이들을 존중하려면, 그들에게 자기 종교를 전해서도 안 된다는 논리를 폈다. 당시 한 신학자가 기독교인의 전도 행위를 '신학적 인종차별'이라고 비판하자, 뉴비긴이 그에게 '신학적 간음'을 조심하라고 충고했다는 에피소드는 널리 알려져 있다.

- 에큐메니컬 진영에서 회심을 경험하고 신자와 목회자, 선교사가 된 뉴비긴은 교회 일치와 기독교 신앙의 포괄성과 공공성이라는 에큐메니컬 운동의 유산을 몸소 익히고 구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생애 후반기의 뉴비긴은 회의주의적 탈기독교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교인에게 역사적 유산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라고 권면하면서 복음의 절대성과 예수 그리스도의 최종성을 강조했다. 복음주의자들은 뜨겁게 성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