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이재근) - 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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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이재근) - 3

조용한 3류 2023. 11. 6. 22:31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⑭] V. S. 아자리아 : 인도 기독교의 자립과 일치를 구현한 20세기 전반 아시아 기독교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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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래에 널리 알려졌듯, 20세기 중반 이후 세계 기독교의 중심은 더 이상 서양이 아니다. 기독교인 수에서 비서양 지역 기독교인은 유럽과 북미, 오세아니아의 전통적인 백인 기독교인 수를 압도적으로 뛰어넘었다. 전도와 선교, 사회봉사 등, 기독교인의 활력과 에너지를 보여 주는 현장에서 활동하는 헌신자들 수에서도 이제는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기독교인이 서양 기독교인보다 많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넘치는 부요함은 잉글랜드인, 미국인, (유럽 - 역자 주) 대륙인에 의해서만, 그리고 일본인, 중국인, 인도인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일하고, 모두가 함께 예배하고, 모두가 함께 우리 주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을 배움으로써 온전히 실현될 수 있습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우리가 충만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모든 성도와 함께' 할 때입니다. 이것은 두 인종 간의 영적 우정으로만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배우고, 서로 돕고자 해야만 합니다.

앞으로 올 모든 세대 내내 인도 교회는 선교 단체의 영웅적인 노력과 자기 부인의 수고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일어설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질로 가난한 자들을 먹이셨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또한 사랑도 요청합니다. 우리에게 친구를 주십시오!"14)  - 1910 에든버러 세계 선교 대회  두 번째 연설 -

 


- 초기 선교지 한국에서 이름 없던 여성들이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를 받으며 인생 처음으로 이름을 갖게 되었듯, 카스트 하층민으로 태어나서 자신을 비하하는 이름을 가졌던 이들이 세례 후 원이름 대신 성경 이름으로 새 이름을 받았다. 흐르는 냇물 속에서 세례를 받은 이들은 옛 카스트의 신분과 악습과 공포와 자기 비하가 세례의 물을 통해 완전히 씻겨 내려가고, 새롭게 된 자아로 거듭났다는 환희에 자주 휩싸였다. 성찬도 마찬가지 의미가 있었다. 서로 다른 카스트에 속한 이들과는 함께 식사하지 않는 인도 문화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같은 상 위에서 나누고, 이어서 함께 식사하는 성찬 의식은 카스트제도를 넘어서 새로운 가족을 만드는 하나님나라의 잔치였다.

- 이 교회의 인도인 지도자들과 성공회의 아자리아는 서양 선교사들이 인도에 전파해서 세워진 수많은 교파는 성경의 명령과는 관계없는 그들의 분열 유산을 인도에 이식한 것이라 판단했다. 따라서 이미 편견으로 가득한 선교사들 없이 인도인만 따로 모여 교회 연합을 논의해 보자는 데 합의했다. 이 노력이 당장의 결실을 보지는 못했지만, 결국 1947년 9월, 즉 아자리아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에 남인도연합교회와 성공회, 감리회가 연합한 남인도교회(Church of South India)의 탄생으로 이어졌다.21)

- 둘째, 남인도에는 사도 도마로부터 기원한 무려 2000년에 이르는 풍성한 기독교 전통이 있었다. 따라서 아자리아는 민족과 종족과 언어와 카스트별로 분열을 정당화하고 지속하는 인도 문화 배경 속에서, 한 분이신 그리스도와 사도의 교회에서 기원한 인도 교회는 그 창시자가 하나가 되라고 하신 유언, 죽음과 삶의 문제와도 같은 이 명령을 지켜야 한다고 확신했다.22)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⑮] 페스토 키벵게레 : 아프리카 기독교의 역동성을 체현한 아프리카의 사도 (이재근, 2019.10.02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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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최소 30% 이상이 이 아프리카 토착 교회 소속이다. 또한 여전히 소속은 전통적인 서양 교파 교회에 있다 하더라도, 이들의 예배 및 믿음, 실천의 유형은 그 교파의 전형이라기보다는 아프리카적인 경우가 많다.

그는 20세기 아프리카 종교와 정치를 각각 대표하는 두 요소인 부흥과 독재를 모두 경험했다. 20세기 중반기 세계 최대의 부흥인 동아프리카 부흥을 통해 회심하며 자신의 기독교적 정체성을 형성했고, 최악의 독재자 이디 아민(Idi Amin, c.1925~2003) 체제하에서는, 그리스도가 그랬듯, 저항하며 동시에 용서하는 기독교인의 양심을 보여 주었다.

우간다인 은시밤비와 잉글랜드인 처치의 협력으로 1930년대 초에 르완다 동부 가히니(Gahini)에서 첫 부흥이 일어난 후, 1930년대까지 르완다, 브룬디, 우간다 전역으로 퍼져 갔다. 1940년대부터는 케냐와 탄자니아, 수단도 부흥의 영향권 안에 들었다. 이 부흥이 처음 일어나서 퍼진 지역인 가히니 지역의 언어인 루간다(Luganda)어 단어 '발로콜레'(Balokole)가 이때부터 이 부흥을 지칭하는 다른 이름이 되었다. 발로콜레는 루간다어로 "구원받은 사람"(the Saved People)을 뜻했다. 죄 고백과 회개, 회심,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전적인 믿음과 헌신, 성령세례, 성화와 성장을 강조하는 '발로콜레' 부흥은 17세기 경건주의 이래로 모든 부흥 운동이 전형적으로 강조해 온 요소(죄·회개·회심·십자가)에, 케직 운동 등 19세기 성결 운동의 성화 사상이 가미된 부흥이었다.

 

어느 날 술 마시는 모임에 참석했다가 비틀거리며 자전거를 몰고 귀가하던 길에 그는 한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예수를 만났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생하고 기쁨에 찬 얼굴로 고백했다. 친구와는 완전히 다른 자신의 상태에 절망한 그는 집으로 돌아온 후 깊은 영적 고뇌와 기도 속에서 결국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을 경험했다. 이 경험을 키벵게레는 성공회 주교 자격으로 1974년에 참가한 로잔 대회에서 부흥사다운 언변으로 흥미진진하게 간증했다. 이 간증에 담긴 고백이 동아프리카 부흥에 참여한 이들이 공유한 전형적인 경험이자 표준이었다.

죄에 대한 인식, 십자가의 그리스도 조우, 고백과 회심, 해방감, 절망을 벗어난 환희는 동아프리카 '발로콜레' 부흥의 공통 요소였다. 이전 시기의 다른 부흥 및 대각성도 마찬가지였다. 회심 직후 키벵게레는 오랫동안 그가 미워했던 불신자 아프리카인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화해했다. 이어서 그가 수년간 증오해 왔던 잉글랜드인을 만나기 위해 50마일을 찾아가 용서를 구하고 친구가 되었다. 회심 이후의 상호 죄 고백과 용서, 화해 역시 동아프리카 부흥이 양산한 공통의 유산이었다.

 


로잔 대회 당시 가장 크게 이슈가 된 주제는 남아메리카 복음주의자들이 주장한 복음주의의 사회참여 문제와 동아프리카 장로교 총무이자 케냐 사람인 존 가투(John Gatu, 1925~2017)의 '선교 모라토리엄' 주장이었다. 남아메리카 복음주의자들의 주장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결과, '새의 양 날개' 혹은 '칼의 양날' 비유로 흔히 알려진 복음 전도와 사회참여의 동반 중요성 문구가 등장했다. 서양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더 이상 필요 없다고 외친 가투의 선교 모라토리엄 선언도 대회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당시 동아프리카전략그룹에서는 가투의 주장을 놓고 격론 끝에 공식적으로는 "전체적 모라토리엄이라는 개념을 부인했지만, 외국 자본에 건강하지 못한 모습으로 의존하는 문제를 지적하고 특수 상황에서 고려할 수 있는 '모라토리엄 이면의 개념'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진정한 평화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언제나 마음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향할 때 찾아온다. 그러나 이 평화는 항상 어떤 대가를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고난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며 이런 사랑을 체험한 사람들마다 그 사랑은 어떤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실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⑯]  C. S. 루이스 : 어정쩡하고, 내키지 않고, 예기치 못한 여정으로 '순전한 기독교'를 옹호한 20세기 변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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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이 회심은 여러 면에서 소극성으로 대변되는, 주저하는 변화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기독교 역사 속에서도 사도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처럼 갑작스럽고 즉각적인 회심을 경험한 이들이 있었고, 칼뱅처럼 눈에 띄지 않게 점진적으로 회심에 이른 이들도 있었다. 루이스의 경험은 수년에 걸친 점진적 과정이었다는 점에서는 칼뱅과 유사했다. 그는 1929(혹은 1930)년 봄 학기에 유신론으로 개종한 후, 1931년 9월 19일과 10월 1일에 각각 기독교가 '참된 신화'임을 깨닫고, 유신론에서 성경의 초자연적 진술에는 여전히 부정적인 '합리주의적' 기독교로 넘어갔다. 그러다 이듬해 6월이 되어서야 최종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을 비롯한 전통적인 신앙을 수용했다.8)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사용된 용어와 그 정의 및 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여전히 미궁이다. 그 과정은 지난했고, 감정적이거나 체험적이기보다는 지적이었으며, 내키지 않는 중에 심각하게 주저하며 진행되었다. 그러나 이후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합리적 확신을 하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 말하자면, 기독교의 공통되는 보편적 교리를 받아들이는 '순전한(mere)' 기독교인들은 현관 마루라는 공통의 장소에서 환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순전한 개별 기독교인은 각기 다른 세부 교리·신조·주장·입장에 따라 각 방으로 들어갈 수 있고, 실제로 들어가야 한다. 그 방은 각각 가톨릭·성공회·장로회·감리회·침례회·제자교회·성결회·퀘이커·메노나이트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그는 한방에 들어갔다고 해서, 자신과 다른 방에 들어갔거나, 아직 현관 마루에 머물러 있는 사람을 비난하거나 공격하지는 말라고 당부한다. 그것이 순전한 기독교인이 따라야 할 공통의 규칙이기 때문이다.14)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보수와 개혁의 깃발을 양손에 붙든 20세기 최장수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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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세기 후반기의 결정적인 분기점은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 재임기에 진행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바티칸 II)였는데, 이 공의회에서 논의된 이슈와 결정 사항은 20세기뿐만 아니라, 가톨릭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혁신적인 개혁으로 평가된다. 이후 요한 바오로 1세와 2세, 그리고 21세기의 두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현직 프란치스코 교황 재임기는 바티칸 II 정신에 대한 해석과 적용을 서로 달리하는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의 현재진행형 줄다리기 상태라 할 수 있다.

- 폴란드계 이탈리아인으로, 바티칸 전문 역사가 지안 프랑코 스비데르코스키가 쓴 대중적인 전기에 따르면, 사람들에게 '대위님'이라고 불린 카롤의 아버지와 아들은 거의 일심동체였다. 군인 출신이었음에도 조금도 권위주의적이지 않았고, 아들에게 신앙을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신앙과 삶의 원칙을 지키는 일에서는 타협이 없었다. 매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던 모습이 나중에 사제와 교황이 된 카롤에게 각인되어 있던 아버지의 이미지였다.5)

- 1993년에는 바티칸과 이스라엘 간 외교 관계를 수립했고, 개신교, 정교회, 성공회와도 교류했다. 시리아 등 이슬람 국가 방문을 요한 바오로 2세만큼 많이 한 가톨릭 지도자는 역대로 없었다. 1992년에는 갈릴레오에 대한 중세 재판이 오류였음을 인정했고, 2000년 3월에 열린 '용서의 날' 미사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 십자군 전쟁, 13세기 종교재판 당시 가톨릭교회의 참여와 묵인에 대해 참회했다. 1981년 5월에 터키인 청년 메흐메트 알리 아자의 암살 시도에 총탄을 맞고 중태에 빠졌다가 회복되고 2년 후에는 직접 감옥에 있던 청년을 찾아가 용서와 사면을 청했다.14)

바티칸 II는 이전 공의회들이 시대정신에 저항하며 신앙적, 교리적, 신학적 보수화와 정통 회귀를 지향한 것과는 다른 길을 택했다. 오히려 '여기 지금'(here and now)에 초점을 맞추고, 오늘 이 세상이 변화하는 물결에 발맞추어, 복음을 이 시대의 요구와 필요에 맞게 적용하고 적응하는 과정을 교회가 수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VIEW) 최종원 교수는 최근에 <복음과상황>에 기고한 글에서 바티칸 II에서 일어난 주목할 만한 사건과 의미를 다음 몇 가지 키워드로 요약했다.16)

         첫째, 전례 수정. 미사를 드릴 때, 기존에 라틴어만을 사용했던 전통을 버리고 자국어를 사용할 수 있게 했고, 사제가 지성소, 즉 앞만 보고 미사를 집전하는 대신, 회중석에 앉은 신자를 바라보고 미사를 집전하게 했다. 또한 미사 여러 순서에서 사제 이외에 평신도도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요한 23세에 이어 교황이 된 후 바티칸 II를 이어 간 바오로 6세는 이 전례 개혁안을 토대로 <로마 미사 경본>을 작성해서 1970년에 공표했다.

         둘째, 에큐메니컬 교제. 기독교 역사 속에서 서로 싸워 분열된 이들을 '이단'이 아닌 '형제'로 규정한 첫 공의회가 바티칸 II였다. 1964년 1월에 바오로 6세는 동방정교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와 만났는데, 여기서 1054년에 서로 파문했던 역사를 뒤집었다. 종교개혁 이후 '열교裂敎', 즉 찢겨 분리된 교회로 부른 개신교도 '분리된 형제'로 새롭게 정의했다.

         셋째, 평신도의 능동적 참여. 미사 중 평신도에게도 역할이 주어진 것은 평신도 사도직이라는 가톨릭 내 혁신적 신학자들의 조언을 수용한 결과였다. 주로 '만인 제사장직'이라는 표현으로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의 모토가 된 평신도의 적극적인 목회 참여가 가톨릭에서도 중요한 일상으로 자리 잡은 계기가 바티칸 II였다.

 

1) "가톨릭교회는 이들 종교(세계의 거대 종교들 - 필자 주)에서 발견되는 옳고 성스러운 것을 아무 것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생활과 행동의 양식뿐 아니라 그들의 규율과 교리도 거짓 없는 존경심으로 대한다. (중략)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진리를 반영하는 일도 드물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라는 것 (중략) 을 반드시 선포해야 한다."(바티칸 II, <비그리스도인 선언 2항>). (중략)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토록 다양한 종교들을 낳게 하였다는 사실에 놀라기보다는, 그들 다양한 종교 안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공통점들 때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5장 '왜 그리 종교가 많은가?')17) 
3) 상호 존중은 진정한 '일치 운동'의 전제 조건입니다. 저는 조국에서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폴란드를 다양한 신앙과 다양한 민족들에 대한 관용을 허용하는 사회로 만든 역사적인 사건들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서구의 역사에서 이교도를 화형에 처했던 그 시절에, 야기엘론 왕조의 마지막 왕은 이런 말을 통해 폴란드의 관용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나는 너의 양심까지 지배하는 왕은 아니다." (23장 '왜 분열되었는가?')19) 

 

- 요한 바오로 2세, 『희망의 문턱을 넘어』

 

- 그러나 바티칸 II를 더 깊은 개혁을 요구하는 시발점으로 보았던 이들은 요한 바오로 2세의 보수성을 비판한다. 예컨대, 가톨릭 내 진보적 노동 및 사회운동을 대변하는 조직으로 널리 알려진 <가톨릭일꾼>(Catholic Worker)21)의 한국어판 신문 발행 및 편집 책임을 맡고 있는 한상봉은 요한 바오로 2세를 "진보 신학을 거절한 반개혁적 인민주의자"로 평가한다. 즉, 그는 대중과 소통하고 전 세대를 만나 대화하고 널리 마음을 연 따뜻하고 친절한 인물이자, 교회 내 진보 세력에게 어느 정도 바람막이가 되어 준 '인민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사제와 수녀의 정치 개입을 반대하고, 주교에게 순명하라고 요구하며, 사회와 가난에 대한 관심은 좋지만 행동주의에 빠지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한 '반개혁적' 인사였다며, 그의 이중성을 비판한다.

- 1984년 교황의 첫 행선지는 5·18민주화운동의 상처가 남아 있는 광주였다. 미사 집전 장소가 무등경기장이었지만, 교황은 광주공항에서 경기장으로 바로 가지 않고, 5·18 운동 핵심 지역인 전라남도청과 금남로를 통과해서 경기장으로 갔다.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곳을 방문하고 싶다는 교황의 뜻에 따라, 소록도로 간 교황은 한센병 환자들 머리에 하나씩 손을 얹고 축복을 베풀었다. 40만 명 정도 모인 것으로 추정되는 부산 강연에서는 노동자들의 정당한 임금 문제를 언급했고,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청년들과 가진 대화 자리에서는 최루탄 상자를 선물로 받았는데, 이는 독재정권의 폭압을 세상에 알리겠다는 응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