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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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이야기
자, 호, 아호... 정확한 구별은 모르겠다. 성년이 됐을 때 부친의 친구분이나 스승이 지어주는 이름을 자라 하고 나머지를 호라 한다면, 그리고 내가 호가 있어도 될 만한 인물인가 하는 물음을 제외한다면, 나 스스로 나에 대해 붙인 이름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렇다고 지금 내 이름에 어렸을 때나, 아니면 성장해서 무슨 불만이 있었던 건 아니다. 한때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큼 흔한 이름이었지만 내가 학교에 다닐 때는 그 시절이 절정을 지난 터라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 나중에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같은 이름을 가까이에 둔 적이 없다.
내가 최초로 내게 붙인 호는 '란(亂)'이었다. 고등학교 때 학교 신문을 만들었었는데, 두 달에 한 번 나오는 신문을 만들기 위해 우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었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자부심도 있었고 그런 마음이 이른바 필명을 하나씩 만들게 했다. 처음으로 학교 신문 칼럼을 쓰던 날, 내가 지은 필명이 란이었다. 뭘로 지을까 하고 끙끙거리며 집에 가는데 석양에 흔들리는 버드나무가 그리도 괜찮았었나 보다. 내 성씨가 버들이고 보면 자연스럽게 그때 그 모습이 그린 듯이 떠오른다. 그것 말고도 차가울 한자에 큰 산 악자를 써서 '한악(寒岳)', 큰 바다 양자에 입사귀 엽을 써서 '양엽(洋葉)'이라 짓기도 했지만 그리 써보지는 못한 것 같다. 어지간히 외롭고, 한편으로 방황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지금까지도 즐겨 사용하는 '묵류'는 대학 1학년 때 춘천 가는 길에 공지천에 흐르는 물을 보며 문득 떠올린 것이다. 잠잠할 묵자에 흐를 류자 묵류(黙流). 난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그 얘길 들은 한 여학생은 그 나이에 묵류가 뭐냐며, 격류가 차라리 낫겠다고 말한 기억이 난다. 뭐든 계속할 자신이 있었다면 격류라고 택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 나의 삶은 모든 것이 낱말 그대로 방황이었다.
그렇게 지은 묵류는 3학년이 되기 전에 을숙도에 갔을 때 진정한 의미를 내게 보여주었다고 생각한다. 석양빛이 일렁이는 낙동강 물결은 도도하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마치 헤세의 싯달타에서 뱃사공이 언급했던 강의 의미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가 이메일 아이디로 쓰는 silent.ryu도 바꾸어 보면 묵류가 아닌가? (물론 흐를 류가 아닌 내 성인 류지만.) 전혀 그럴 의도도 없었고, 그 아이디를 지을 때는 진심 없는 이 세상에 대한 불만으로 그래, 입을 봉하고 날파리나 촉새가 되지 말자고 생각할 때였다.
몇 년 전에 이삿짐을 싸는 김에 많은 것을 버렸었다. 나는 버리길 좋아한다. 아깝지 않고, 이제 소용이 없다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굳이 필요하지 않은 건 굳이 옆에 두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러다가 박사 학위를 하고 처음 시간강사를 할 때 출제했던 시험지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시험지 우측 상단에 범운이라는 작은 글자가 있었다. 평범할 범자에 구름 운. 범운(凡雲)... 아련히 잊혔던 이름이 생각이 났다. 범운은 장기 집권하는 묵류에 실증이 나서 만든 호였는데, 그때 나는 동네 뒷산이었던 구룡산을 무척 좋아했었다. 마치 한줌 흙을 하늘에서 살포시 놓아서 만든 것 같은 모습도 좋았거니와 대모산에서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중턱의 산길은 단연 최고였다. 그 구룡산에서 지나가는 구름을 보며 지은 이름이었다.
자신이 닮고자, 되고자 하는 모습이 이름으로 된 것 같은데, 의도한다고 이름이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자기도 모르게 자기한테 맞는 이름이 걸리면 떼어 놓아도 안 떨어지고 원래 내 이름이었던 것처럼 따라 다니게 되나보다. 하나 사소한 얘기를 하자면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중에 작가가 된다면 필명을 따로 둘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따로 지으면 정신 사나우니까 그냥 류묵류라고 할까 하고 궁리한 적이 있었다. 가수 이효리 양이 '이효리 거꾸로 해도 이효리'라고 랩 아닌 랩을 한 기억이 났다. 류묵류, 거꾸로 해도 류묵류. 그런데, 발음하기가 불편했고, 무엇보다도 '류'는 지금 이름과 결합해야 내가 편했다. 묵류, 썩 괜찮다. 물론 묵류라고 인터넷 검색을 하면 도토리 묵류 등이 죽 나열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