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손바닥 소설] 뒷면1 본문
아마 2012년 7월에 썼을 겁니다. 무대는 삼국지 적벽대전에서 동남풍이 불기 시작하는 대목입니다.
뒷면 1
'아니, 왜 매번 이리 위험하게 일을 하는 거야? 조금만 삐끗해도 우린 모두 죽음인데...'
조노인은 조자룡 휘하의 군졸이었다. 나이는 젊지만 새치머리가 많아 모두들 노인이라 불렀다. 성씨는 위국의 조조와 같았지만 조자룡은 장난삼아 아저씨라 부르곤 했다. 조노인은 아까부터 수상한 눈길로 힐금힐금 내려다보고 있는 오나라 군졸들이 몹시 신경 쓰였다. 조자룡 말대로라면 조금 있다가 바람이 불기 시작할 거고, 그러면 그들은 그동안 오나라에 머물렀던 제갈공명을 모시고 그들의 진지로 돌아가야 하는 거였다. 그래서 조자룡의 정예 심복들로 구성된 그들은 어젯밤에 어부들로 가장해 강가에 배를 대고는 어물쩍거리며 시간만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오나라 보초가 다녀가기는 했지만 뱃머리에 누워 있던 조노인의 모양새를 보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버린 뒤였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철통같이 제단을 둘러싸고 있다가 이쪽으로 신경을 주는 군졸이 하나둘씩 생긴 것이다.
조노인은 군졸의 신경을 딴 데로 옮길 겸, 또 늘 하던 대로 이 동네 공기의 냄새라도 맡을 겸 거적때기 같은 장막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조자룡과 신호를 주고받고는 밖으로 나왔다. 그는 일부러 신경 쓰이던 군졸한테 가서 가까운 곳에 주막이 없냐고 선소리를 해댔다. 요량한 대로 작은 소리가 일자 제단 위에서 질서를 유지하고 있던 장수가 이쪽을 주시했고, 오나라 군졸은 에그머니나 하는 몸짓으로 그를 데리고 군막 뒤로 가더니만 저쪽으로나 가보라며 내쫓았다. 조노인은 머리를 감싸고는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물론 이런 전쟁터 속에 주막이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조노인은 혹시 몰래 술추렴이나 하는 군졸들이 없는지 두리번거리며 걸어갔다. 정말 그는 이런 일에 이골이 난 터였다. 그가 조자룡을 처음 만났을 때 목숨을 구한 것도 다 이 능력 덕이었다. 그때 산적질을 하던 배원소는 관운장을 기다리고 있다가, 세상을 떠돌던 조자룡의 창 한 솜씨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대부분의 산적들은 귀순을 허락했지만 조자룡은 산적의 냄새가 몸에 가득 밴 배원소의 심복들은 영 탐탁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조노인이 그가 파악한 관군의 동향을 보고하자마자 조자룡의 신임을 받게 된 거였다. 그는 타고난 첩자였던 셈이다.
'그러고 보면 배원소와 산적질할 때는 뱃속이 참 편했지. 아니, 그 다음도 괜찮았어. 뭐 대충 우르르 달려가고, 대충 때각때각 싸우고, 또 대충 우르르 도망가고 하면 됐으니까.'
그러다 단복이 유비의 군사가 되자 일이 달라졌다. 뭘 하려고 한다는 게 도대체 조노인의 눈에 안 들어왔던 것이다. 그건 관운장이나 장비, 그리고 조자룡 같은 장군들도 마찬가지였다. 단복이 작전을 지시한 날이면 관운장은 입이 더욱 무거워졌고, 장비는 도대체 무슨 꿍꿍이냐며 투덜거렸고, 조자룡은 이해하려고 애쓰는 눈치였다. 그러다가 단복이 유비 곁을 떠나자 다시 세상사가 뻔해졌는데, 새로이 제갈공명이 군사로 부임하자 일반 병졸들은 정말 한치 앞을 모르게 되었다.
'하긴 그런 걸 나 같은 졸개가 알 필요는 없어. 근데... 하지만... 내용을 모르니 시킨 대로만 하게 되잖아?'
그래도 조자룡이 공명의 신임을 받아 작전을 수행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조노인도 나름 생각할 것들이 많아졌는데, 유비와 손권이 힘을 합쳐 장강을 사이에 두고 조조와 대치한 후로는 짐작 못 할 일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조노인은 번(番)을 서고 돌아온 군졸들이 쬐고 있는 모닥불 곁에 한 뼘 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딴 사람 같았으면 웬 놈이냐며 야단났겠지만, 이상하게도 조노인이 슬쩍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면 마치 온 동네를 제 집처럼 돌아다니는 개가 들린 양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를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여느 때와는 좀 달랐다. 모닥불을 둘러싼 병졸들은 동시에 조노인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리 모두 야단이지?"
"우리야 뒤에서 식량이나 나르고 돌아다니는 군졸들이지만 지금 딴 데는 난리야. 마치 오늘 강 건너 쳐들어갈 기세야."
조노인은 별로 관심 없다는 듯 쭈그리고 앉아서 불 속에 새로 장작을 몇 개 던져 넣었다. 이제 조노인에게 신경 쓰는 군졸은 아무도 없었다.
"난 오늘 드디어 공격령이 내릴 거라고 보네."
한 명이 뭔가 자신만 알고 있다는 투로 고개를 쳐들며 눈을 내리깔았다. 얼굴이 유난히 붉었다.
"공격은 무슨 공격. 저 자석은 맨날 지만 뭘 알고 있다는 투야."
다른 한 명이 들고 있던 나뭇가지로 불속을 휘저어댔다. 얼굴이 유난히 검었다.
"허허, 왜 이래. 너희 같은 돌들은 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를 거야."
흑안은 기가 차는지, 털썩 주저앉더니 어디 한 번 얘기해보라며 팔을 휘저었다.
"사실은... 너희들 황개 장군이 일부러 매 맞은 거 모르지?"
적안은 한참 얘기를 쏟아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얼굴이 붉지도 않고 검지도 않은 군졸이 대들었다.
"야, 말도 안 돼. 내가 그때 황장군 볼기를 내리친 놈을 잘 아는데, 걔 진짜 세게 쳤대. 그게 만일 꾸민 거라면 그놈은 눈치 없이 세게 때렸다고 나중에 죽어."
적안은 너무도 쉽게 한풀 꺾였다. 그러나 다시 너무도 쉽게 고개를 빳빳이 쳐들며 떠들어댔다.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그런데 너희들 알아? 오늘 드디어 공격을 할 거라고."
군졸들은 또 무슨 흰소리냐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어디 한 번 들어보자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자신들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이 시작될 거라는데 관심이 없는 병졸이란 있을 수 없었다.
"내가 감녕 장군 밑에 있는 놈한테 들은 말인데 언제든지 출전할 준비를 갖추라고 했대. 그리고 불에 잘 타는 섶과 어유(魚油)도 배에 가득 실어 놓으라고."
"야! 감장군은 걸핏하면 내일 출동한다며 군기 잡는 것도 모르냐? 너 오나라 군 생활한 지 도대체 몇 년 된 놈이냐?"
흑안과 불흑부적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어댔다. 적안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저 봐라. 가만있던 깃발이 슬슬 흔들리잖아? 저게 펄럭여 봐라. 배가 살같이 날아서 곧장 위군 진영에 처박히는 거야. 그럼 불바다..."
"예끼, 미친놈!"
흑안이 아직 불씨가 남아 있는 나뭇가지를 적안에게 던졌다.
"이놈아, 겨울엔 북풍이 부는 거야. 넌 태어나서 고기만 잡던 놈이 그것도 모르냐?"
"하긴... 그렇네."
그들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오늘 하루도 잘 갔다며 엉덩이를 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노인도 모닥불을 마저 끄는 시늉을 하다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조용하던 깃발이 조금씩 펄럭이기 시작하는 거 같았다.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군사께서 오신다고 했지. 나도 빨리 배로 돌아가야겠군. 그나저나 오늘 일만 아니면 어디 주막을 찾아가서 따듯한 술 한 잔이나 걸치고 갔으면 좋으련만...'
갑자기 조노인은 전장을 떠돈 이후 들르지 못한 노모와 처자 생각이 났다. 그는 첫날밤의 마누라라도 생각났는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래, 살아야지. 어쨌든 살아서 집으로 가야지... 근데 진짜 바람이 불기 시작하네. 음... 어라? 바람이 북풍이 아니네.'
서둘러 배로 뛰어 가던 조노인은 오군 진중의 깃대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서북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갑자기 발이 땅에 붙은 듯 자리에 멈춰 섰다. 소름이 쪽 끼쳤다.
'동남풍, 동남풍이야... 설마, 설마...'
잠시 후 조노인은 다른 군졸들과 열심히 노를 저어 가면서, 또 조자룡과 태연자약하게 담소를 하고 있는 공명을 바라보면서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설마, 동남풍을 군사께서 비셨을까? 설마, 이럴 줄 알고 모두 공격을 준비하고 있으라고? 설마... 설마, 이럴 줄 알고 시간 맞춰서 배를 강가에 대라고 몇 달 전에 하셨을까?'
배는 동남풍을 받아 살같이 유비 군의 진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