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손바닥 소설] 금지된 재현 본문
2011년 여름에 쓴 것 같습니다.
그 다음 해에 '융합문학의 밤'이라는 중편에 넣어버렸었고,
얼마 전에 소설집 '달까지 걸어가기'에 담았습니다.
무척 아끼는 아꼈던 글입니다.
금지된 재현
나는 구석 자리의 서준을 알아보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술조차 약해진 40대 후반들은 실직한 그를 위로하느라 분주히 술잔을 돌렸다.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잔뜩 취한 친구 하나가 내 옆으로 왔다.
"직장이…… 전부도…… 거울 속에…… 있다느니……."
서준을 억지로 데려왔다는 그 친구는 문장 하나를 제대로 완성할 수 없었지만, 난 다 알아들었다고 생각했다. 반년 전의 일이다.
40여 년 전이었을까? 자연 시간이었다.
"저 말고 딴 게 보일 수는 없나요?"
서준이의 거듭된 질문에 선생님은 난감해 했다.
"그럼, 거울인데." "빛의 반사라는 거야." "너, 동화책을 너무 봤구나." "애가 바보도 아니고……."
맨 끝의 말은 맨 앞자리에 앉은 나만 들었을 것이다. 그날 그 덕분에 아이들은 한 시간 내내 딴 짓을 하며 놀 수 있었다.
서준이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다음날이 발인이라고 했다. 동창 녀석은 조문에 대한 말은 흐린 채 뜬금없이 쏟아지는 겨울비만 탓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나는 그럴 때면 꼭 있는 야근을 마치고 밤늦게야 영안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젠 친구를 보내는 나이였다.
영정 속에서 퀭한 두 눈으로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서준을 바라보며 그의 동생과 절을 나누었다. 접객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의 동생은 맞은편에 앉아 뭔가 털어내듯 술잔을 기울였다. "형님이 너무 하셨어요……." 이제 내 나이면 침묵이 금이다, 라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안다. 내가 한 잔을 마실 동안 그는 석 잔을 비웠다. "생활은 나 몰라라 하시고…… 형수님만 힘들고……." 돌아보는 동생의 눈길 너머로 검은 상복을 입은 서준의 아내가 들어왔다. 그녀는 슬퍼하기엔 너무 지쳐 보였다.
"그 나이에 그만두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잖아요? 근데…… 만날 거울 앞에서……."
오는 길에 많이 젖었는지 내 회색 양복은 여전히 어깨가 검었다.
그러고 보니 서준이네 집에 놀러 갔던, 아니, 생일에 여러 명이 초대받았던 적이 있었다. 숨바꼭질 중에 나는 그 당시엔 흔치 않았던 수세식 화장실에 숨었는데, 그곳엔 이미 서준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술래가 화장실을 지나치자 우리는 문 뒤에서 슬며시 나와 큰 거울 앞에서 놀기 시작했다. 서준이는 이때를 무척 기다린 듯 했다.
"자, 봐."
그는 왼쪽으로 가다가 갑자기 오른쪽으로 틀었고, 뛰어오를 듯이 움츠리다가는 오히려 아래로 몸을 숙였다. 한참을 그랬다. 그러다가 시무룩한 얼굴에 눈물까지 글썽거리던 서준이 때문에 나는 술래가 다가오는 줄도 몰랐었다.
"응, 내일 아니, 오늘 발인까지 보고 가려고…… 응, 휴가 내는 건 다른 사람한테 부탁 했어……."
난 아내에게 전화를 걸고는 잠시 눈을 붙였다.
장지에서 오는 길은 비가 눈으로 바뀌어 하얗고 미끄러웠다. 그의 동생이 옆에 와서 앉았다. 마치 나를 초등학교 동창생 대표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휴대폰을 내밀었다. "한번 보실래요?" 그게 서준의 마지막 사진들이라고 했다.
"마지막까지 거울이었어요. 멀쩡하시던 분이……."
여느 욕실처럼 큰 거울이, 예전에 숨바꼭질할 때처럼 벽에 걸려 있었다. 넘기는 사진마다 서준은 끊임없이 거울 속에 있었다. 난 한 번 넘겨보고는 동생에게 그 중의 한 장을 보내달라고 했다.
어느 4월의 주말을 소파에서 졸고 있었다. 친구와 전시회를 다녀온 아내가 막 들어왔다. "참 좋던데, 그런 데도 같이 가고 그래요." 난 아직도 괜찮은 아내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가 갖다놓은 팸플릿을 집었다. "초현실주의라…… 정말 비몽사몽이구먼……." 난 팸플릿을 넘기다가는 탁자에 툭 던졌다. 그러나 잠시 후에 다시 집어 들었다.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다가 어느 그림 앞에서 멈추었다.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
난 방으로 뛰어 들어가 휴대폰을 찾았다. 놀란 아내가 무슨 일이냐며 따라 들어왔다. 그곳에 '금지된 재현'이 있었다. 다만 뒷모습의 사내가 아닌 앞모습의 서준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거울 속의 서준도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아내가 왜 그러느냐고 내 어깨를 흔들 때는, 앞에서 웃고 있는 서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