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맥성의 하루 (7) 본문
해시가 가까워 왔다. 모두 준비를 마치고는 관공 주위로 모여 들었다.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 모든 장수들은 내 말을 가슴 깊이 간직하여 한 치의 어긋남도 없도록 하라.”
“예!”
장수들의 비장함을 못 이긴 듯 촛불조차 바람에 일렁임을 멈추고 있었다.
“형주는 사방으로 트여 있어 지키기에 용이한 곳이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앞뒤로 적을 허용한 건 분명 내 잘못이다. 또한, 나를 대신하여 형주를 지킬 재목을 키우지 못한 것도 잘못이다.”
관공은 관평 장군, 주창의 이름을 불렀다.
“그대들과 요화는 내가 오관참육장하며 조조의 땅을 헤쳐 나갈 때 만났던 이들이다. 그동안 충심으로 이 못난 사람을 받들어 주었다. 더 크게 썼어야 하는데 평생 심부름만 하게 했구나. 내가 어디에 있더라도 그대들을 잊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왕보, 조누. 그대들의 말을 금은처럼 간직했어도 오늘 이러한 낭패가 없었을 것이다. 형주를 맡은 후에 그대들 몇 사람 말고는 새로이 인재를 구하지 못했으니 이 또한 나의 게으름이다.”
관공의 단호한 어조에 사람들은 숨 막히는 긴장 속에서 눈빛으로만 궁금증을 드러냈다.
“가장 큰 잘못은 항일과 같은 썩은 선비놈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내가 형주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그들이 바람에 풀잎 눕듯이 항복한 것은 바로 나의 잘못이다.”
관공은 잠시 말을 멈추고 어리둥절해 하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무른 대추빛 얼굴에 한층 위엄 어린 목소리로 마침내 명을 내렸다.
“아무도 다른 말을 말라. 나는 북쪽 작은 길을 취해 서천으로 갈 것이다.”
의아했다. 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저리 말씀하시는 건가? 어떻게 하든 관공만은 살아 서천으로 가게 하려고 모두가 목숨을 내놓았는데. 갑자기 세상이 온통 하얘졌다.
“주창은 여기에 남아 나 대신 맥성을 지키라. 현정은 어떻게든 살아남아 공명한테 이 모든 것을 알리어라.”
“관공, 어찌 그런 분부를 내리십니까?”
봉(鳳)의 눈이 부릅떠지고 삼각수염이 거슬러 올랐다.
“감히 내 명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관공은 자리에 벌떡 일어서서 주창이 받들고 있던 청룡도를 받아 탁자를 불같이 내리쳤다. 탁자는 아무 소리도 못 내고 두 동강이가 났다.
“항일의 글을 읽고 많은 생각을 했다. 형주에서 일어난 일은 서천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객(客)이다. 형주나 서천이나 아직까지 즐거운 마음으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그들은 또 다른 강한 자가 나타나면 바람에 풀잎 눕듯 그를 붙좇을 것이다. 형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들도 이제는 그 나이가 적지 않고, 아무리 공명이래도 혼자서 조카를 도와 위와 오를 상대할 수는 없으리라.”
나는 잠시 멍해졌다, 이 다급한 마당에 이런 한가한 얘기를 하다니. 하지만 그건 분명 중요한 얘기였다. 선제와 의형제 사이인 관공에게는 형주의 곤경보다, 자신의 안위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자신들이 40년 가까이 달려온 제국의 꿈, 그 꿈이 큰 벽에 부딪힌 걸 느낀 것이다.
“송곳 세울 만한 땅도 없던 우리가 이곳 형주를 얻고 서천 땅을 차지했다고 대업을 이룬 게 아니다. 지금 천하의 중원은 조조가 차지했고 장강의 지리는 손권이 누리고 있다. 우리는 인(人)을 차지해야만 천하를 얻을 수 있다. 이 이치를 잠시 잊은 죄를 여기서 씻어, 서천에도 있을 수 있는 어리석음을 경계하고자 한다.”
관공은 암축하듯이 하늘을 우러러보다 말을 이었다.
“내가 죽는다면 이 뜻을 이루는 것이고, 살아 촉으로 간다면 하늘이 감동하여 내게 또 다른 기회를 줌이니라.”
나는 관공의 선택이 옳은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니, 관공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서서히 동의해 가고 있었다. 관공만큼은 아니어도 그들 역시 그 제국의 꿈을 위해 젊은 시절을 전쟁터로 내닫은 이들이니까. 나 역시 스승을 만난 이후 한시도 놓은 적이 없던 그 꿈, 바로 천하통일의 꿈. 그러나 그 뜻을 헤아릴 수는 있지만, 살아서 같이 천하를 다투는 게 가뜩이나 사람이 없는 촉나라에 이로운 일이 아닌가?
급박한 중에 금낭이 하나 더 있었다는 기억이 났다. 지금이라도 그걸 열면 상황을 돌이킬 수 있을까? 뜨거워진 머리는 터질 듯 지끈거렸고 땀에 젖은 탓에 갑옷은 천근만근 무겁게 느껴졌다. 그러나 관공은 내게 그런 시간마저 허락하지 않았다. 벌써 적토마에 높이 앉아 청룡도를 비껴들고는 부릅뜬 봉의 눈으로 왕보와 주창에게 맥성을 부탁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삼각수염을 흩날리며 관장군과 조누와 함께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북쪽 길로 사라져갔다.
잠시 후, 칠흑 같은 사방에서 적군의 함성이 세상을 떠날 듯 일어났고, 적들은 조숫물 밀듯 성으로 짓쳐 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