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봄꽃이 늘 그렇듯 (2) 본문
조금씩 ‘영혼으로 살기’에 적응하나 봅니다. 퀸스타운의 풍경을 떠올리자 지금 제가 있는 동네가 점점 작아집니다. 날아오른 것도 아닌데, 마치 공중에서 보듯이 동네가 눈앞에 펼쳐집니다. ‘구글 어스’로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시가 보이고 바다가 나타나고, 드디어 한반도가 눈에 들어옵니다. 점점 속도가 빨라집니다.
바닥에서만 사는 2차원 인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는 바닥에 그려진 담을 통과할 수 없지만 3차원 인간은 그냥 넘어가면 됩니다. 마치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그 경로를 따라 가는 것도 아닌데 순식간에 어디엔가 도착했습니다. 산이 보이고, 바다 같은 옥빛 호수, 그림 같은 마을…… 왠지 낯설지만은 않군요. 아, 언젠가 아내와 함께 왔던 퀸스타운, 그것도 이틀 밤 묵었던 그 호텔 앞입니다. 우리는 마을을 한 바퀴 돈 후에 호텔로 돌아왔었습니다. 밤에도 호숫가에는 불을 켜 놓아 검은 어둠 속에서 옥빛 물이 반짝거렸지요. 저는 호텔로 들어가기 전에 밤하늘에서 남십자성을 찾으며 담배를 피웠고요. 예,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담배를 피울 수 없기에 그냥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 호텔은 위층에 작은 바가 있는데 그때도 거기서 맥주를 한잔했었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그런 기억이 떠올라도 그렇게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마치 더운 여름에 지난겨울의 추위를 떠올리며 “그땐 추웠었지.” 하는 것 같습니다. 추운 겨울에 밖에서 떨다가 집에 들어와 “아, 춥다.” 하며 몸서리칠 줄 알았는데…… 세상을 달리 한다는 게 이런 걸까요? 제가 무얼 말하고 싶은지 아시겠지요?
마침 한국인 여행객이 맥주를 마시고 있네요. 저도 빈자리에 앉아봅니다. 부부인가 본데 사방에 우리말 아는 사람이 없는 걸로 알고 목소리가 조금 크군요.
“당신, 그 여자 정말 몰라?”
“몰라. 여행 와서 처음 봤는데 내가 어떻게 알아?”
“근데 표정들이 왜 그래? 그 여자도 이상하고. 서로 피하는 것 같애.”
“말 되는 소릴 해야지. 오히려 당신이 그 남편 아는 것 아냐?”
“아니, 왜 얘길 돌려. 같은 대학 나왔다고 모두 아니?”
“아까 점심 먹을 때 옆에 앉았었잖아. 되게 불편해 하던데?”
“이 남자가…… 쇼를 하세요, 쇼를.”
좀 오래된 부부는 저렇게 되더라고요. 단체로 여행 오면 서로 비교를 많이 하지요, 행복은 상대평가가 아닌데. 여자들은 매일 얘기하는 게 돈, 자식, 남편. 남자들은 음…… 얘기 안하고 술만 마시나? 하하. 천 년도 못 사는데 주제가 너무 뻔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 누구는 그런 자그마한 다툼들이 ‘밥상 위의 행복’이라고 하지만, 글쎄요……. 그게 행복이라면, 처자식 먹여 살린다고 갖은 애를 썼는데, 그러니 남자들이 젊을 때 잘 했어야지, 자식도 품안에 있을 때 자식이지, 누가 낳아 달라고 했나 해준 게 뭔데, 이런 말들은 행복에 겨운 비명인가요? 하하.
그나저나 이 부부는 이 좋은 데 와서 별것 아닌 걸로 싸움을 계속 합니다. 옆에 한국 사람이 있는 줄 알면 안 그럴 텐데요. 아참, 제가 사람이 아니지요, 깜박했습니다. 그것 아십니까? 뉴질랜드에서는 음주운전으로 적발되면 그 차를 팔아서 벌금을 제하고 돌려준다고 합니다. 저는 기를 써서 해외 여행가는 젊은이들을 별로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해외로 나가는 목적이 꼭 외국어를 배우고 전문 지식을 넓히는 게 아니래도 자기가 알던 세계 외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 그걸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우리(관대한 이해를 바랍니다)는 절대적인 인식을 하는 게 아니라 상대적인 차이만 알 수 있는 게 아닌가요? 하하, 영혼이 되니까 좀 고상해지나 봅니다.
맥주도 못 마시니 좀 심심하네요. 술도, 담배도 금단 현상은 없는데, 습관은 남는 모양입니다. 이 부부 때문에 시끄러워 못 앉아 있겠습니다. 종업원도 자꾸 눈치를 주는데 쓸데없이 당당하네요. 또 다른 열등감의 표현일까요…….
밖으로 나왔습니다. 사실 좀 겁이 납니다. 이 낯선 곳에서 뉴질랜드 영혼을 만나면 어떡하지요? 영혼도 외국어를 알아야 할까요? 포카레카레 아나를 부르면서 도망쳐 버릴까요? 갑자기 앞으로 어떻게 할지 막막해집니다. 그래도 불타, 예수, 공자, 노자 이런 분들의 말씀을 들은 게 세상에 태어난 가장 큰 보람이었다고 하면 좀 봐주지 않을까요? 그대로 실천을 안 했으면 아무 소용없다고요? 허허, 산 자의 여유를 부디 잊지 마십시오, 언젠가는 제 입장이 될 텐데요.
호숫가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노래 가사처럼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때처럼 검은 어둠 속에서 옥빛 물이 불빛에 일렁입니다.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르 웃으며 뛰어 가는 아이들, 다정하게 뒤따르는 엄마 아빠……. 정말 서양 아이들은 특히 딸아이들은 저 만할 때 참 이쁘지요. 정말 인형 같지요. 영혼이 된 지금도 이쁜 딸은 눈에 들어옵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버릇은 이젠 버려야 하는데…… 허허.
아직까지 날지는 못합니다. 원래 영혼도 날 수는 없는지 모르지요. 병원에서처럼 여기도 길이 있어 산중턱까지 내쳐 달려봤습니다. 내일은 이 일행을 따라서 피오르드나 보고 올까요? 그럴 필요 없지요. 간절히 생각하면 이 밤중에도 바로 갈 수 있는데. 근데 정말 아까 그 부부는 심합니다. 제가 서 있는 길에서 창 너머로 방안이 보이는데 지금도 열심히 싸우고 있네요. 영혼이 되니까 귀는 좋아진 것 같습니다. 제가 부부 싸움할 때도 누가 저처럼 지켜봤는지 모르지요. 어이구, 여자 분이 문을 쾅 닫고 나가는군요. 천년만년 사는 것도 아닌데 성질부리기는……. 저는 호숫가나 한 번 더 돌렵니다.
밤이 지나갑니다. 시간이 일정하게 가지를 않습니다. 바쁘게 일주일을 보내면 금방 지난 것 같아도 길었던 것처럼, 반대로 지겨워서 빈둥거리면 천천히 가는 것 같아도 짧았던 것처럼 여겨지지 않나요? 그런 상황이 좀 더 심하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호숫가에서 잠시 머뭇거렸는데 동쪽 하늘이 밝아 옵니다. 산책하는 사람들의 입김이 새하얗게 공중에 머물러 있습니다. 정말 몸이 있었다면 물가의 냉기로 꽤 추웠을 것 같네요.
호텔 앞에는 한국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나 봅니다. 하하, 저기 돌아서서 혼자 담배 피우는 분이 어젯밤 그 남편 분이군요. 연기를 뱉는 폼이 몹시 쌓이신 것 같습니다. 제 바로 옆에서 아내 되는 분은 일행 여자 분들과 얘기를 하시고요.
“저 부부, 너무 나이 차가 나지 않아요?”
“남자 분이 늦게 결혼했다고 하던데요.”
“부부 맞아요?”
“왜요?”
“남자가 모자로 자꾸 얼굴을 가리잖아. 여자도, 어머, 오늘 화장한 거 좀 봐.”
“진짜. 어디 나가는 여자 같애.”
“그럼, 부부가 아니고 그렇고 그런 사이의 남녀란 말예요? 어머머, 저런 사람들 하고 어떻게 같이 여행을 다녀!”
저보고 남성우월주의령이라고 할까봐 참았는데 요즘 우리나라 여자분들 정말 이상합니다. 왜 그렇게 과한 반응을 보이지요? 끊임없이 살피고, 황당하게 추정하고, 함부로 말하고. 약이 잔뜩 오른 치와와가 고개 바짝 들고 뭐 없나 하며 돌아다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아파트 위층에 사시는 분이 하도 쿵쿵거리고 걸어서 아내가 몇 번 얘기하러 올라갔었지요. 이렇게 가벼운 몸매로 어찌 ‘쿵쿵’ 걷겠느냐, 너무 예민하신가 보다, 뭐 이런 식으로 한두 번 부딪혔나 봅니다. 그날도 ‘쿵쿵쿵쿵’ 걷기에 아내가 몇 번 벽을 쳤답니다. 그래도 점점 더 심해지자 위층으로 올라갔지요. 그 분이 문을 열자마자 ‘야! 이 XX년아, 너 시끄러우라고 일부러 그랬다.’ 하더랍니다. 거짓말이 아닙니다. 오죽했으면 잠시 후에 그 집 어린 아들이 대신 사과한다고 내려왔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여자를 예로 들었지만 남자도 이상하긴 마찬가집니다. 나중에 알고 보면 보통 사람들인데, 왜 그렇게 여기저기 힘을 주는지 모르겠더군요. 회장, 사장 흔한 줄 알았는데, 가장 흔한 게 이사더라고요. 물론 등기부에 등재된 이사들은 적지요. 또 뭔가 대단한 일을 했다고 해서 놀라고 보면 거품도 많고요. 뭐, 저야 이미 떠났지만, 정상으로 가야 모두가 편하지 않을까요?
잠깐 버스 위에 앉았습니다. 버스가 빨리 달리고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저는 끄떡없습니다. 편하게 누웠습니다. 파란 하늘, 하얀 구름, 한 편의 꿈이라도 좋습니다. 아하, 엎드려서 얼굴을 쑥 집어넣으니 안에 탄 사람들이 보입니다. 어휴, 왜 이렇게 시끄럽지요. 근데, 이상합니다. 모두 입 다물고 여행 가이드 설명을 듣고 있는데…….
“북유럽의 피오르드, 캐나다 로키의 만년설, 오스트리아 잘쯔캄머굿. 뉴질랜드는 이 세 가지를 다 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밀포드 사운드에서 피오르드를 유람선으로 관광하실 겁니다. 지금 여기는 날씨가 좋지만 그쪽은 모릅니다. 호머 터널을 넘어 봐야 알겠습니다.”
“방에 뭐 두고 온 거 없겠지?”
“아빠하고 안 싸우는지 모르겠네. 엄마 없다고 맨날 사먹고 있는 거 아닐까?”
“밖에 나오니 좋긴 좋구나. 좋은 시절 다 뭐하고 보냈누…….”
“별거 아닌데 왜 10만원을 달라고 했지? 젊은 게 박박 대들지만 않았어도…….”
“걔를 왜 여기서 만난 거야? 그걸 어떻게 남편한테 얘기해?”
어느 절의 홈페이지에서 읽은 건데, 스님이 돌아가신 다음에 불당으로 들어가니까 다른 스님 한 분이 염불 대신 “목탁, 목탁” 하더랍니다. 찬찬히 따져 보니 영혼은 인간의 생각까지 들을 수 있던 게지요. 염불하시는 스님이 평소에 그 스님의 목탁에 마음을 두신 모양입니다. 단지 우스갯소리인 줄 알았는데.
한참동안 별의별 얘기를 다 들었습니다. 덕분에 그 부부싸움의 진실을 알게 됐지요. 뭔가 있는 줄 알았는데 별거 아니었습니다. 궁금하다고요? 하하,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그 두 부부는 도청당한 기분일 텐데. 별로 인간 세상에 보탬 되는 얘기는 없으니 나중에 한가할 때 간단히 말씀드리지요, 정말 간단히. 영혼이 되니까 별 의미 없는 일(그냥 인터넷 서핑하기 등등)에 보낸 시간이 무척 아깝게 느껴지네요. 제가 영혼이 아니었다면 사건 전말을 몰랐겠지요? 혹시 저의 생전의 삶도 이런 사소함의 ‘적분(積分)’은 아니었을까요? 천 년도 못 사는데 참 그렇지요…… 에이, 여기는 이만 떠날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