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L부장의 영혼 (3) 본문
(3)
L부장은 간이칸막이를 쳐서 급히 마련한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 물러나면 평연구원이 되는 관례를 벗어난 특별대우였다. 그나마 간이칸막이로 위로를 받은 그는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튼실한 다리로 열심히 엘리베이터 옆의 계단을 오르내렸다. 그가 방안에서 무엇을 하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가 앞으로 언젠가는 생길 불만 세력의 중심이 될지, 아니면 그럴싸하게 자신을 포장해서 다른 곳으로 떠날지 모를 일이었다. 적어도 연구 현장으로 돌아가는 모범적인 연구자상을 보여줄 거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이게 뭐야, 당신 말대로 다 했는데.”
부장에서 해임된 뒤 그토록 기다리던 시펨이 나타난 건, 그가 답답한 속을 풀려고 사이다를 컵에 부어 빨대로 열심히 휘젓고 있을 때였다.
“여전하구만. 빨대로 젓고 있게.”
시펨이 손가락을 가볍게 허공에서 퉁기자 사이다에서 한순간에 거품이 빠져 나왔다.
“탄산가스는 치아에, 몸에 안 좋으니까. ……N파는, 최교수는 어떻게 된 거지?”
“아직 모르고 있었군. 발령 나기 전날 그 제자가 벤처 사기 혐의로 붙잡혀 가더군. 그 다음은 당연히 짐작하겠지?”
L부장은 그제야 발령 전날 자기를 보고 웃던 소장도, 그런 웃음과는 전혀 반대인 발령도 다 이해가 갔다.
“시펨, 난 괜찮아. 난 자리에 연연하는 그런 사람은 아냐. 다만 우리 부, 아니 우리 단 사람들이 걱정이야. 신임 단장 그 친구는 기초연구를 이끌고 갈 비전도, 능력도 없어.”
“그래. 자네가 10년 가까이 그 자리에 있었으니 그런 생각이 날 만도 하겠지. 잠시 나와 같이 가볼까? 자넬 기다리는 민중의 아우성을 들어볼까?”
시펨은 L부장을 비상계단으로 데리고 갔다.
“앞으로 한 시간 동안은 사람들 눈에 안 보일 거야. 한 시간이야, 잊지 말게.”
사람들은 비상계단이 비좁을 정도로 많이 모여 있었다. 그 중엔 지원팀장, A부 정보통인 김박사 그리고 윤석우도 보였다.
“아니, 윤박사. 그래서 역술가한테까지 갔었단 말이야?”
“김박사, 윤박사가 얼마나 끔찍하면 그랬겠어요? 근데 4월이면 모든 고민이 해결된다고 했는데, 아무 일도 없고 점점 암담해지는 거야. 그러다 발령 난 날이 음력 4월 마지막 날이었던 거예요.”
지원팀장의 말에 모두 거기가 어디냐며 탄성을 질렀고 윤석우는 빙그레 웃으며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그나저나 앞으로 우리 L부장은 어떻게 지낼까?”
“어떻게 지내긴? 그만 둬야지. 여태까지 뿌린 게 있는데 사람들을 어떻게 보고 지내려고.”
그 말을 한 건 뜻밖에도, 언제 들어 왔는지 뒤쪽에 서 있던 이박사였다.
“딴 사람은 몰라도 이박사가 그런 말 하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냐?”
“김박사, 이상하게 생각 말아. 잘해준 건 잘해준 거고 현실은 현실이지. 본인이 견딜 수 있겠어? 그 자존심에?”
L부장은 부르르 떠는 팔을 꽉 붙잡았다. 벌써 30분이 지나 있었다.
“그런 말이 있습디다. 옆 단의 M단장은 더러운 놈, 우리 L부장은 치사한 놈이라고.”
또 무슨 얘기를 물어 왔나 싶어 모두 김박사를 쳐다보았다.
“M단장은 남 보는 앞에서 때린 데만 계속 패는 식이고, L부장은 남의 손을 빌려 때리는 식이라고.”
“파우스트에 그런 말이 있던데요. 악마는 사람의 목숨을 유혹할 수는 있지만 빼앗을 수는 없다고. 그래서 남을 이용해서 죽인다고.”
L부장에게 가장 만만한 먹이였던 윤석우였다. 그가 휴우, 하고 내뿜은 담배연기는 바로 L부장의 얼굴로 다가왔다. 흡연을 야만인의 습관으로 여겼던 L부장은 두 손을 휘저었으나 연기는 흔들리지도 않았고 냄새도 나지 않았다. L부장은 한 시간이 되기 전에 서둘러 여기를 떠나야 했다.
“아, 그런데 이박사. 우리 L부장님 논문 많잖아요? 자기 이름 안 들어가면 원고 승인 결재도 안 해줬는데. 그 논문으로 학교 가면 되겠구먼.”
“지원팀장님, 모르시는구먼.”
L부장은 김박사의 말에 문을 나가려던 발을 초조하게 멈췄다.
“L부장이 얼마 전에 C대학에 원서를 낸 모양이야. 동창 녀석이 전화를 했더라고. 1년에 어떻게 백 편도 넘는 논문을 내냐고, 그것도 여러 분야에 걸쳐서. 사실이냐?, 묻더라고. 난 딱 한 마디만 했어. 제발 우리 좀 편히 살게 어서 뽑아가라고.”
떠들썩하게 터지는 웃음소리에 위층에서 담배 피우던 사람마저 고개를 빼서 내려다봤다.
“L부장이 그 유명한 D연구소를 다녔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래요. 들어간 데는 다른 데였는데 D연구소와 합병하는 바람에 통칭 그렇게 부르게 됐다고. 뭐 자랑할 경력도 아니라던데.”
L부장은 김박사와 지원팀장의 말에 부르르 떨면서도 방으로 뛰어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
다행히 시펨은 아직 떠나지 않고 있었다. L부장은 온 몸에 땀을 흘리며 열에 들떠 외쳤다.
“시펨! 나 당신 하라는 대로 할게. 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걸 보여줘야 해. 김박사, 이박사 이놈들, 지원팀장 이 자식, 모두 내게 무릎 꿇고 용서를 빌게 해야 해.”
“뭘 해달라는 거지?”
“영혼을 팔겠다고, 파우스트처럼. 그러니 날 도와줘. 내게 힘을 줘!”
L부장의 얼굴은 보기 흉할 정도로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뭘 팔겠다고?”
탁자 위로 올린 왼발을 까딱거리며 시펨은 좀체 말을 쉽게 해주지 않았다.
“영혼! 내 30년 믿음이 물거품이 돼도 좋으니 내 영혼을 사란 말이야!”
“뭔 말이지? 난 영혼을 팔라고 한 적이 없어.”
“없다니? 시펨. 난 장난칠 시간이 없어. 내 영혼을 팔라고 유혹해 놓고는 왜 말이 없어? 날 데려가려고 그토록 함정에 빠뜨려 놓고는.”
“L부장.”
시펨은 히물거리며 왼발을 까딱거렸다.
“안됐지만 자넨…… 영혼이 없어. 팔고 싶어도 팔 영혼이 없단 말이야. 알아듣겠어?”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영……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나 같이 고매한 인격을 가진, 미국에서 유명 대학을 나오고 세계 최고의 연구소를 다닌 내가 영혼이 없다니? 여기 내가 읽은 이 수많은 책들을 보라고.”
“흐흐, 그거 다 별거 아닌 거 본인 스스로가 잘 알지?”
L부장은 물에 빠진 생쥐 모습이 되어 갔다. 땀은 머리를 적시고 관자놀이를 거쳐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처음에는 우리도 영혼이 없는 자들을 싫어했어. 데려 갈 게 없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들도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지. 자네 같은 자들 때문에 멀쩡한 인간들이 지쳐서 사랑을 잃어가는 거야. 물론 우리한텐 좋은 일이지. 흐흐.”
L부장은 거의 30년 만에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지마, L부장, 아이처럼. 자네가 원하는 대로 좋은 학교로 보내 줄 테니까. 그곳에서 다시 잘 해보는 거야. 여기서 한 것처럼 아이들을 영혼이 없는 도구로 만들어 보라고. 칼은 잘 들면 되는 거야. 조리용이든, 살상용이든 그게 중요한 게 아냐. 안 그래, 우리 L부장? 흐흐.”
시펨은 까딱거리던 왼발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그래서 자네가 윤석우 그놈을 그토록 싫어한 게야. 자꾸 쓸데없이 의미를 따지니까. 그런데 그녀석도 인간의 선을 사랑하기보다는 악을 증오하게 됐지. 다 자네 덕이야. 우릴 증오하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사랑할 엄두를 못 내는 건 무척 고무적이지, 흐흐흐. 어쨌든 재미있었어. 어? 울어? L부장, 곧 괜찮아질 거야. 자넨 영혼이 없으니까. 흐흐흐.”
시펨이 떠난 후에도 L부장의 30년 만에 흐르는 눈물은 좀체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