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변명사(辨明士) (2) 본문
(2)
방영*은 오늘도 영혼들이 거닐고 있는 길을 벗어나 검은 나무로 된 외딴 집에서 홀로 비탄의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그는 친구가 보낸 메일에 답장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만 괴로워하게. 그건 그냥 할 말이 안 떠오르고 직장에서 작성할 서류가 많아서 잠시 미루었을 뿐이네."
물론 나는 항상 부드러운 목소리다.
"자식의 죽음을 겪은 친구입니다. 할 말이 따로 있겠습니까? 그냥 괜찮으냐고, 힘들지 않느냐고 하면 됐던 것입니다. 아무리 바쁘다고 그 말 한 마디 할 시간이 없었겠습니까?"
방영*의 얼굴은 쓰디쓴 표정만 남아있었다. 그는 변명이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가 며칠 답이 없자 그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그런 메일을 받고 나서 아무 답장이 없었던 제가 이상했겠지요. 그런데 저는 그 흔한 위로의 말 한 마디 안 했습니다. 변명사님 말씀대로, 그냥 할 말이 안 떠올라서…… 하며 주춤거리기만 했습니다."
"여보게, 남의 자식의 죽음에 슬퍼하는 게 생각보다 어렵다네. 흔한 일도 아니고…… 맹수들은 다른 무리와 싸워 이기면 남의 자식들은 다 죽이지. 자기 자식의 잠재적 경쟁자니까. 인간도 아직 진화 중인 단계야."
"설사 그렇다고 해도 부모의 죽음에는 서로 문상을 가지 않습니까? 특히 제가 살던 나라에서는 어른들이 돌아가시면 예의 표시가 각별했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어색했던 게야. 손아래 사람의 죽음에 뭘 어떻게 표현할지 몰랐던 거지. 그리고 잘못 말하면 그 친구가 더 가슴 아플까봐 망설였던 거야. 그 나라에서는,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지 않던가?"
애써 준비한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가끔은 변명을 해준다고 하다가 오히려 죄책감에 불만 지를 때가 있다. 능숙한 나도 이번에는 아차, 했다.
"맞습니다. 자식의 죽음은 부모의 죽음과 비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부모가 돌아가셔서 슬퍼하는 사람에게 자식과 부모를 맞바꾸겠냐고 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처음엔 이게 뭔가 하는 표정을 짓다가, 나중엔 뭐 이런 게 다 있나 하고 달려들 것입니다. 그렇게 괴로운 일에 저는 한 마디 위로도 하지 않은 겁니다. 저는 그렇게 감정이 메마르고, 공감 능력 없고, 인간의 가면만 쓴 짐승, 아니, 짐승만도 못한 놈입니다. 저를 다시는 빛을 볼 수 없는 그 지옥에 영원히 가둬주십시요."
"여보게, 그 정도로 다들 지옥에 간다면 지옥에서는 과로로 파업이 일어날 거야. 자, 그러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히게. 자넨 참사의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 아파하던 착한 심성의 사람이었어. 사실은 그가 그리 가깝지 않은 친구였던 게야."
방영*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울음이 그치더니 흐릿한 미소마저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 참사의 당사자들은 모두 제 친구였나요?"
하아, 이런…… 계속 어긋나는구먼.
"음, 그러면 하나가 아니고 여럿이 죽어서 슬퍼했던 건가 보네."
이번에도 그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저는 남의 나라 전쟁 뉴스를 보며 별로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이 죽어가는데도 말입니다. 말씀하시는 뜻은 알겠는데, 그는 제 친구였고 저는 그에게 정말 나쁜 놈이었던 겁니다. 어서 저를 심판으로 넘겨주세요. 그리고 빨리 지옥으로 보내 주세요."
"허, 참. 지옥은 내 담당이 아니네. 그리고 남의 업무에 참견하면 여기서는 큰 벌을 받는다네. 만약 자네가 살았던 나라에서처럼 창구 앞에 줄서지 않고 어디엔가 전화를 걸어 부탁이라도 한다면 난 앞으로 2백만 년 동안 월급을 못 받아."
"예? 아니 이곳에서도 월급을 받고 사나요? 그러면 죽은 후에도 생계를 걱정하고 노후를 염려해야 하나요?"
"그럼! 월급을 못 받으면 얼마나 지내기가 힘든지 몰라. 그런데 여기서 월급은 여러 성자들의 깨달음에 관한 가르침일세. 하루라도 그런 좋은 말씀을 못 들으면 우린 한없는 공복감을 느끼지. 자, 그런 얘기는 그만두고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세."
난 도대체 변명이라면 한 마디도 받아들이지 않는 방영*의 벗겨진 이마가 조금씩 얄미워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미안할 거라면 비록 인사치레일 뿐인 전화라도 한 통하거나, 그해 연말에 보내온 송년인사 메일에 답장이라도 하지…… 그러나 나는 이내 근무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런 게 다 해결돼있다면 어찌 이승이겠는가?
"자, 이런 생각을 해보게. 원래 사람이란 남과 완전하게 교감하기 어렵네. 당장 그대가 자기 팔을 꼬집어도 남이 그 아픔을 못 느끼는 것처럼. 그러니 자네가 메일을 받고 천천히 감정이 성숙되어 가는 도중에 그 친구가 전화를 한 거지. 너무 빨리 전화를 한 게야. 남의 상가에 조문을 가면 처음부터 슬픈 일은 드물잖은가? 엄숙한 분위기도, 검은 상복도, 향냄새도, 그리고 간간히 들리는 울음소리와 한숨소리도 한몫을 하는 거야. 그러면서 점점 슬퍼지는 거지. 원래 자네는 상가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이를 보고 얼마나 가슴 아파했는가? 자네가 얼마나 두 눈을 시큰거렸는지 내가 다 아네. 여기서 조사하려고 하면 이승의 기록들은 순식간에 다 나오거든."
"그가 전화를 빨리 준 건 아닙니다. 그 시간이라면 제가 전화를 걸었어도 수백 통, 아니 수천 통 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정말 죽일 놈인 일이 또 있습니다. 그 친구는 그래도, 이런 쓰레기 같은 놈도 친구라고 연말에 안부를 묻는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요. 저는 그때도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1년 후에야 그 메일에 답장을 보냈습니다. 이런 제가 인간입니까?"
"아니, 물론 지금은 인간이 아니지. 그리고 인간, 그거 별로 좋은 거 못 되네, 영적으로 높은 단계가 아니…… 그래, 이건 딴 소리고. 이 친구야, 그렇게 자학하지 말라고. 그해는 자네가 정말 바빴던 해야. 자네가 부서의 태스크포스에서 일한다고 정말 눈코 뜰 새 없었잖아? 그리고 그 친구 연하장은 자네말고도 동시에 여럿에게 보낸 거잖아? 게다가 자네가 어쨌든 1년 후에 답장했을 때 그 친구는 퉁명하게 대했다고. 자네가 그런 식으로 하는 건 다 그 조직의 풍토병이라면서. 그러니 그 친구도 자네에게 잘못한 게 있는 셈이야. 이제 그만 그 집채만 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라고. 그 일은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닐세."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뭘 잘못했는지 더욱 또렷하게 알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해에 제가 바쁘기는 했지만 아무리 바쁘다고 전화 한 통 못 했을까요? 메일을 받은 그날도, 그 다음날도 저는 술자리 예약한다고 술집에 전화를 걸어 마담과 시시덕거렸습니다. 그런 제가 사람입니까? 원래 직장 떠난 지 몇 년 된 사람이 옛 동료들에게 연하장 보내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 답장하는 데 몇 분이 걸린다고 그 다음해에 보냅니까? 간단하게 답장을 하려니 전에 잘못한 게 켕긴 거지요. 그래도 양심이 아주 없지는 않았나봅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런 양심이 있는 놈이 1년 있다가 답장을 보내요? 저는 미친놈이고, 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더러운 놈입니다. 제가 뭐가 잘났다고, 제가 무슨 위인이라서 세계가 들썩거릴 일을 한다고, 자식 먼저 보낸 친구에게 두 번이나 답을 안 하고 그나마 받은 지 1년이 지나 뻔한 말로 답장을 한다는 겁니까? 정말, 위선이고 가식이고…… 저 같은 놈은 더 이상 여기 머무를 자격도 없어요."
그 친구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몇 번 더 시도를 했지만, 전혀 진도가 나가지 않자 잠시 그 검은 나무로 된 집에서 물러나왔다. 왜냐하면 또 한 친구가 별것도 아닌 일로 이번엔 하얀 나무로 된 집에서 통곡하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