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변명사(辨明士) (3) 본문
(3)
하얀 나무 집의 채혁*은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머리를 하얀 벽에 찧으며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몇 천 년 만에 처음으로 한숨이 나왔다. 이 두 영혼을 보내고 나면 몇 십만 년 만에 휴가라도 신청해야할 것 같다.
"여보게, 그만 찧게나. 돈 3백만 원 안 빌려줬다고 머리를 찧는다면 온몸이 분자형태로 파쇄가 돼도 부족한 죄인들이 많아. 그리고 자네는 돈 빌려달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듣지도 못했어."
채혁*은 내 말이 답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더 머리를 극성스럽게 벽에 찧어댔다. 이 친구는 검은 나무집에 있는 방영*보다 더 어려울 것 같다.
"이봐. 그 사람이 얼마를 언제까지 빌려줄 수 있냐는 메일을 보낸 게 다야. 자네는 3백만 원이 가능하다, 그러나 준비할 시간이 좀 필요하다, 꼭 필요하면 다시 연락을 달라, 그렇게 답장을 했어. 그 후에 자네는 메일도, 전화도 받지 못했어."
채혁*은 벌겋게 된 눈으로 나를 노려봤다.
"왜, 다 알면서 이러십니까? 그 사람은 돈이 필요하다고 분명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날짜가 다가오자 전화를 주었습니다. 제가 죽일 놈입니다. 거절한 것도 아니고 빌려줄 듯이 해놓고는 모른 척해버린 것입니다."
"아냐. 그때 자넨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겼어. 자네는 쫓기고 있는 친구를 만나, 자네 지갑에 있는 돈을 다 털어주고, 자네 휴대폰을 줬어. 그리고 그 친구 대신 사람들을 만나려고 보름 가까이 집을 비웠어. 그때 자넨 제 정신이 아니었어. 그래서 자넨 그 사람이 보냈다는 메일도, 문자 메시지도 볼 수가 없었던 게야."
그는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길 기다린 듯했다.
"아닙니다. 다 핑계에요. 저는 그 사람한테 8개월 후에 전화를 했습니다. 그동안 문자 하나 보낼 시간이 없었을까요?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다시 연락하겠다고 문자 하나 보낼 수 없었을까요? 그동안 제가 휴대폰 없이 살았을까요? 저는 그동안 인터넷에 제가 키우던 강아지 사진도 올리고, 이 신조어의 뜻이 뭐냐고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 제가 메일을 보지도 않았……"
나는 중간에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여보게, 자네가 그의 메일을 보지 못한 건 사실이야. 괴롭다고 일부러 죄를 만들 필요는 없어."
"일부러 만들다니요? 일부러 메일을 안 본 겁니다. 메일 용량이 다 차서 새 메일을 받을 수 없다는 걸 알고도 가만있은 거지요. 저는 정말 제 자신의 교활함에 치가 떨립니다."
"그러지마. 자넨 좋은 사람이야. 자넨 세상 문제에 대해 꼬박꼬박 댓글을 달았고, 남이 필요하다는 게 있으면 자네 돈으로 사서 보내주기도 했어. 그런 착한 심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러니 더욱 가증스럽지요. 제가 지금 육신만 있다면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습니다. 그 사람은 제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메일은 보내도 받지를 못하고, 휴대폰은 다른 사람 손에 있었던 겁니다. 그래놓고는 뻔뻔스럽게 8개월 후에 별일 없었던 것처럼 전화를 한 겁니다."
"여보게, 삼백만원이 무시할 만큼 작은 돈은 아닐세. 그리고 자네는 갖고 있던 주식을 처분해보려고 아는 사람에게 연락까지 하지 않았나? 돈 거래는 이승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야. 남의 돈 떼어먹고 이곳에 온 놈들도 다 지옥에 가질 않아. 남의 임금까지 떼어먹은 놈들도 다 지옥에 가는 게 아니라고. 그런데 자네는 남의 돈을 안 갚은 것도 아니고 안 빌려줬다고 지옥에 가겠다는 거야? 아니, 지옥을 뭐로 보나? 자네는 잘못을 한 게 아니라 착한 일을 하지 않은 거야. 그리고 갑자기 생긴 일로 그 약속을 지키기 어려웠던 거지. 자, 이제 이것으로 마음을 가볍게 하고 저 바깥에서 산책하고 있는 영혼들처럼 걸어보자고. 밖을 보라구. 자네가 그렇게 좋아하는 개들도 나란히 걷고들 있지 않나?"
"아닙니다. 저같이 교활한 놈이 산보를 하면 이곳의 영혼들이 모두 질식할 겁니다. 그리고 제발 그런 변명은 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아는 사람한테 문의를 한 건 사실이지만 주식을 처분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어요. 상장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몇 명만 갖고 있는 주식인데 그게 쉽사리 거래가 되겠습니까? 게다가 연락을 받은 친구는 회사의 운명이 오늘 내일 하는데 무슨 돈이 있겠습니까? 괜히 죄책감을 덜려고 핑계를 만들 수작이었지요. 사실은……"
채혁*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마치 모든 걸 내려놓고 포기할 때 같은 모습이었지만, 이미 여긴 이승의 모든 걸 포기해버린 곳이다.
"사실은 그 사람이 불편했던 겁니다. 내 살아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올리고, 또 성실히 그의 블로그를 방문하여 댓글도 달고…… 그렇게 내 자신이 괜찮은 인간이란 걸 확인하는 작업이 점점 귀찮아졌습니다. 내가 왜, 굳이, 그에게, 그러고 살 필요가 있을까? 그러던 참에 귀찮은 일이 생긴 거지요. 앞으로 그에게서 피해를 볼지도 모른다, 생존에 아무 보탬도 안 되는 공연한 말다툼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했던 거지요."
"여보게, 자넨 그렇게 말은 하지만, 8개월 후에 다시 전화를 걸었을 때 묵묵히 그의 화난 음성을 들어주었지. 그러곤 서울에 올라갈 때 연락하겠다고 했어. 그때 그 말은 빈말이 아니었네."
"빈말은 아니었는지 모르지요. 하지만 다시 만날 수는 없겠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제가 뭐라고 해도 그에겐 뻔뻔한 자기 방어나 잠깐의 감정적 구원을 받고자하는 걸로 보일 테니까요. 다 끝난 얘기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제게서 돈이 들어올 줄 알고 중요한 일이라도 잡았으면 어쩔 뻔 했나요? 모르죠.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그는 제게 배신이라고 했습니다. 맞아요, 맞습니다. 근사하게 가까운 척했는데, 막상 긴급할 때에는 일언반구도 없이 연락이 두절됐으니…… 그러고는 8개월 후에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멀쩡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오고…… 이건 배신이고 뒤통수에요. 이건 정말 더러운 짓입니다. 저를 지옥으로 보내주세요. 지옥으로 보내달라구요. 더 이상 변명은 필요 없습니다."
시커먼 턱수염의 그는 다시 사방의 흰 벽에 머리를 찧어대며 돌아다녔다. 내가 그 집을 나와 3141발자국을 걸었을 때, 검은 집의 비탄은 왼 귀에서, 하얀 집의 통곡은 오른 귀에서 각각 울려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