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태기왕 (2) 본문

글/단편소설

태기왕 (2)

조용한 3류 2015. 1. 30. 21:34

(2)


태기국은 작지만 강한 나라였다. 백성들은 먹고 사는 데에 여유가 있었고 태기왕은 모두가 행복한 나라를 꿈꾸었다. 태기국 주변에는 큰 나라로 낙랑, 백제, 진한, 예 등이 있었고 작은 나라까지 치면 수십이었지만, 근래까지도 서로 평온하게 잘 살아왔었다. 낙랑은 중국을 등에 업었지만 자기 말고 다른 나라들은 다 같은 민족임을 알고 있었다. 백제나 진한, 예 들은 다 힘이 비슷하고 한참 힘을 기르는 중이라 굳이 분란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북쪽에서 새로 태어난 고구려가 하루가 다르게 성장을 하자 낙랑이 주변을 건드리는 횟수도, 누르는 압력도 조금씩 늘어 갔다.


"아바마마. 얼마 전에 백제에서 건너온 이의 말을 들었는데, 백제왕이 그랬다고 합니다. 하루 빨리 낙랑에 맞설 힘을 키워야 한다고, 우리민족끼리 힘을 합쳐 낙랑을 물리쳐야 한다고 말입니다."


태자는 장차 자신이 주인이 될 태기국의 앞날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이 많았다.


"네가 요즘 들어 부쩍 백제나 진한, 예에 대해 관심이 많구나."


태자는 부왕의 칭찬에 얼굴이 밝아졌다가 금세 어두워졌다.


"아바마마, 우리도 어느 쪽에 서야 할지 정해야하지 않겠습니까? 장사꾼들 중에는 곧 전쟁이 날 거라고 물건을 시장에 내놓지 않는 이들도 있다 하옵니다."

"전쟁? 누구와 누가 싸운다고 하더냐? 낙랑과 백제?"


태자는 부왕이 설마 몰라서 묻는 것인가 하는 표정이었다.



"큰 나라들이 낙랑과 대적하기 위해 주변 작은 나라들의 힘을 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너는 큰 나라들이 스스로 삼한의 주인이 되기 위해 공연히 낙랑을 핑계되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느냐?"


"그렇다 하더라도 우린 같은 민족 아니옵니까? 결국은 그 나라가 낙랑으로부터 우리 모두를 지킬 것이 아니옵니까?"


"그래. 네 말은 맞다. 우리와 주변 나라들은 말도 같고, 먹는 것도, 입는 것도, 사는 것도 같은 한 민족이다. 그런데 그걸 핑계로 큰 나라들이 욕심을 채우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너는 알지 않느냐? 지난번에 진한에서 사절을 보내왔을 때도 나는 그렇게 말했었다.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낙랑에 대항하면 되는 거다. 큰 나라, 작은 나라들이 힘을 합해서 맞서면 되는 거다. 낙랑과 가까운 나라는 병사를 대고, 먼 나라는 식량을 대고 하면 되는 거지, 꼭 진한의 밑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느냐고. 지금 큰 나라들은 모두 뒷짐 진 손에 무엇을 감추고 있는 거란다."


"하지만 아바마마, 그렇게 나라들이 느슨하게 묶여서 낙랑과 맞설 수 있겠습니까? 지금 낙랑과 붙어 있는 작은 나라 몇은 이미 백제의 품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내가 백성의 안위는 걱정을 않고 작은 나라의 왕으로 있고 싶어 그러는 게 아니다. 아직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직 늑대가 달려온다는 소식도 없는데 미리 장정을 불러서 늑대로부터 지켜달라고 우리 양들까지 죄다 바칠 필요가 있냐는 거다. 중국에서 쫓겨나서 낙랑으로 들어온 책사들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그들이 합종이다, 연횡이다, 하며 사방으로 떠들고 다닌다는 걸 나도 잘 안다."



태자는 부왕의 입에서 합종이나 연횡이라는 말을 듣자 공연히 마음이 들떴다.


"아바마마, 저는 다른 큰 나라에 우리가 고개를 숙이자는 게 아니라 우리가 그 큰 나라가 되어보자는 겁니다. 큰 나라에 맞서기 위해 우리를 중심으로 작은 나라들끼리 합종을 하는 게 또한 좋은 계책이 아니겠습니까?"


옆에서 태기왕 부자를 모시고 있던 호령장군은 젊은 태자의 식견에 놀라면서 언뜻 동의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태기왕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삼한은 평화롭게 살아왔다. 백제도 고구려에서 떠나온 이들이 세운 나라가 아니더냐? 그들이 오기 전에는 삼한이 모두 평안했다. 말이 마한, 변한, 진한이지 그 안에선 작은 나라들이 모두 그렇게 평화롭게 살아 왔단다. 내가 어릴 때도, 우리의 조상들이 어릴 때도. 꼭 그렇게 하나로 뭉치는 게 진정 세상이 나아지는 길인지 모르겠구나. 100명에게 100그릇의 밥이 있는데도 왜 서로 탐하고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구나."


옆에서 듣고만 있던 호령이 말을 했다.


"폐하의 말씀이 맞사오나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그랬다. 그게 가장 태기왕의 걱정이었다. 작은 나라들이 하나둘씩 큰 나라의 품에 들어감에 따라 남아 있는 나라들은 점점 설 곳이 없어져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선택을 강요받고 있었다. 백제와 심지어 멀리 떨어진 진한까지 태기국에게 뻔질나게 사신을 보내왔다. 가장 가까운 예는 오히려 가만히 지켜보는 눈치였다.


'예국…… 언제라도 달려들 수 있다는 심산이겠지…… 원하지 않지만 세상은 정녕 그렇게 갈 수밖에 없는 것인가?'


그러나 예가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는 것은 가장 가까운 때에 있었던 태기와의 싸움 덕분이기도 했다. 예는 갓 즉위한 태기왕에게 경축을 하는 대신 군대를 보내왔던 것이다. 삼한에서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러나 마치 그럴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처럼 태기왕은 호령장군을 중심으로 예에 맞섰다. 그때 처음으로 등용했던 인재가 삼형제였다. 인근에 효자로만, 힘이 센 장사들로만 소문이 나있던 삼형제는 이 싸움으로 태기군의 가장 중요한 장수들이 되었다. 태기국 백성들은 삼형제들이 제각각 이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꺼번에 삼형제 장군이라 불렀다. 태기왕과 삼형제 장군, 그리고 그들을 뒤에서 돕는 노신 호령장군이 있는 한 태기국은 작지만 함부로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주변에서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먹혔다는 소문이 들리고, 눈치 빠른 장사치들이 의식주에 긴요한 물건들을 제 집 창고에 쌓아두고는 장에 내놓지 않고, 부자들이 간밤의 바람소리에 귀를 곤두세우며 낯선 이들을 불안한 눈초리로 쳐다볼 때도 대부분 백성들은 태기왕과 그들을 믿었기에 그리 불안해하지 않았다.


태기왕은 저녁노을이 붉게 번져가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자야, 머리는 수천 명이 노 젓는 것과 같단다. 그러나 마음은 바람과 같아. 돛을 부풀리다가 돛대마저 부러뜨리지. 바람이 점점 거세어지는구나. 이 미친 바람을 우리가 잘 버텨낼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이렇게 말하며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태기왕은 아들을 그윽한 눈으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