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귀정굴 탈출기 (4) 본문
(4)
귀정리(歸正里) 처녀가 자신을 겁탈하려는 병사를 피해 뛰어 들어간 곳은 귀정굴이었다.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마을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를 범하려는 자는 적군인 왜군이 아니라 조선을 구원하려고 온 명군이었다. 그녀는 귀정강가를 내달리다가 수풀 속으로 뛰어들어 마을 사람이 아니고는 찾기 어려운 좁은 구멍으로 가녀린 몸을 숨겼다. 그녀는 좁은 통로를 통과하고 연못에 첨벙거리기를 몇 번이나 했다. 평소에는 무섭다고 엄두도 못 내었던 그 깊이도 모를 물들을 어떻게 건넜는지 모를 일이었다. 좁은 통로와 넓은 마당을 몇 번이나 돌부리에 채이고 몸을 부딪치며 지났는지 몰랐다. 그녀는 한참을 정신없이 뛰어가다가 결국 돌부리에 채여 넘어졌다. 사방엔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통로에서 새어 나오는 저 희끗희끗한 한줄기 빛을 어떻게 용하게 따라 이렇게 동굴 깊이까지 들어 왔는지 그녀 스스로도 놀라웠다. 그녀는 목마름, 배고픔도 잊은 채 두려움에 떨다가 잠깐, 아주 잠깐 졸았다.
그녀는 목에 서늘하게 감도는 기운에 벌떡 눈을 떴다. 처음에는 뱀인 줄 알았다. 그러나 눈부신 횃불 아래로 얼굴과 손이 온통 긁힌 채, 다 잡은 먹이를 놓칠 줄 알았냐며 의기양양해 하는 명군의 얼굴이 보였다. 명군은 그녀 목에 칼등을 대고 있었다.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던 명군은 다른 손에 들었던 횃불을 바닥에 던져놓고는 그녀 목에 대었던 칼등을 뒤집었다. 그녀는 이제 모든 게 끝인가, 눈을 감았다가 마침내 떴다. 바로 그때 그녀의 눈이 화경처럼 커졌다. 명군은 이게 또 무슨 꾀를 부리냐는 얼굴로 뒤도 쳐다보지 않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바로 그 순간 명군은 바닥에 푹 하고 쓰러졌다.
일단 네 남자는 향토사학자라는 노인보다는 젊은 조유나의 설명이 듣기에 좋았다.
"아, 그래서 뒤따라 들어온 왜군한테 명군이 얻어맞고 쓰러졌단 말이군요. 그래도 명군은 우군이고 왜군은 적군이 아닌가?"
"하사장님, 그게 어디 우군이 할 짓입니까? 그런데 왜군도 같은 짓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민중기는 무슨 상상을 하는지 실실 웃으며 슬슬 얼굴을 문질렀다.
"설마 한 여자를 놓고 중․일 두 남자가 싸우는 그런 드라마는 아니겠지요?"
박승호도 한마디 거들었다.
염교수는 자기보다 젊은 세 남자가, 어지간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민중기까지 한마디씩 하자 유치하다는 듯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조유나는 딴청보다는 유치한 얘기가 낫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도 오늘처럼 굴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 거예요."
왜군과 명군이 실랑이를 하다가 서로 지쳐 동굴 바닥에 드러누운 다음에야 굴이 침수되고 있다는 걸 안 것이다. 게다가 실수로 횃불이 물에 잠겨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그들은 갈팡질팡했다.
"그래서 남자 둘과 여자 하나가 한을 품고 죽었고, 요즘도 동굴에서 귀신으로 나타난다는 뭐 그런 건가요?"
박승호가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 이죽거렸다. 바로 그때 좀 전에 뽀글거렸던 연못에서 다시 잔 거품들이 올라왔다. 박승호는 재빨리 몸을 움츠렸다. 사람들은 그것 보라며 허허 하고 웃었다.
"아뇨. 그들은 죽지 않고 탈출을 해요. 명군이 석순 위에 발을 딛고 한 사람씩 어깨에 올려서 동굴 천장을 통해 밖으로 나가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조유나의 얘기는 뜻밖이었다.
"에이, 너무 신파적이다. 명군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여자와 적군을 구해줬다?"
민중기는 동굴에 들어오자 아주 적극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음성 주광성인 동물이 어둠에서 힘을 얻듯이.
"그럼 명군은요?"
"명군이 발을 딛고 있던 석순이 부러져서 위에서 손이 닿을 수가 없었대요."
조유나는 박승호를 바라보며 아직도 거품이 하나 둘씩 올라오고 있는 물속을 가리켰다. 그러자 박승호는 또 한 번 움찔하다 말았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 편안히 앉아 있던 하사장은 잇달아 큰 공기방울이 올라오자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을 보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염교수였다. "원, 다 큰 어른이……."
전설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조유나에 따르면 두 남녀는 동굴 밖으로 나갔지만 곧 무리 지어온 왜군과 맞닥뜨린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를 구하려고 자신의 동료인 왜군들을 죽이고 우리나라에 항복했다가 마침내 귀화하고 만다. 그가 바로 귀정(歸正) 염씨의 시조라고 했다.
"염씨?"
염교수는 놀라다가 천박하다는 듯 다시 점잖은 목소리로 바꾸었다.
"귀정 염씨라고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성씨가 생각보다 다양합디다."
하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묘한 눈빛으로 염교수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들 역시 그렇게 전설을 듣느라 뒤늦게야 물이 불어난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때 이미 지나온 통로는 반이나 물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조유나를 따라 마지막 제 7광장으로 서둘러 들어왔던 것이다. 동굴 연못 주위가 어스름한 불빛이었고 주변에 높이를 비교할 만한 표적이 없었던 탓에 박승호가 수선스럽게 두리번거리지 않았다면 제 7광장으로 옮기지도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