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귀정굴 탈출기 (5) 본문

글/단편소설

귀정굴 탈출기 (5)

조용한 3류 2015. 2. 4. 12:09

(5)


"아니,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언제 죽어도 괜찮다던 염교수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휴대폰도 안 터지고…… 연락할 방법이 없을까?"


하사장이 물었다. 민중기가 마치 조유나 대신처럼 고개를 옆으로 젓더니 다시 뺨을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정신 사납게 동굴을 왔다 갔다 하던 박승호가 비닐로 된 누런 봉투를 들고 왔다. 마귀할멈이라는 표식 옆의 바위 뒤에서 찾았다는 봉투 안에는 마치 어느 공포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종이의 글은 '그대들은 갇혔다……'로 시작되고 있었다.


"에이, 이거 유치하다, 유치해."


민중기는 박승호한테 이런 장난을 치면 어떡하냐고 했다.


"제가요? 제가 본 영화가 몇 천 편인데 이런 수준 떨어진 짓을 하겠어요?"


하사장은 둘이 티격태격하는 걸 말리고는 일단 읽어보자고 했다.


'나는 그대들에 의해 상처 받은 사람이오. 내가 누군지 스스로 생각해 보기 바라오. 난 보았소. 당신 같은 인간들이 아무 문제 없이 잘 살아가고 있는 걸. 그래서 난 고민했소. 정녕 세상에는 적자생존 외에 다른 진리가 없는 것인지. 사필귀정…… 그게 이뤄질 수 없는 세상이라면 내 손으로 이룰까 하오. 그러나 나는, 그대들만큼 구역질나는 놈은 아니오. 그래서 그대들에게 살 길을 하나 열어 두었소. 그런데 그대들의 인간성이 그 열쇠를 받을지는 의문이오, 의문.'


"아니, 요새 누가 이런 식으로 종이에 쓰지요? 뭐 노트북이나 태블릿 정도는 나와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바로 우리 스마트폰으로 날아오거나."

"박승호씨, 지금 장난할 때가 아녜요. 이 종이 하나면 간단한데 뭐 하러 귀찮게 그런 걸 갖다놓습니까?"


하사장이 점잖게 박승호를 나무랐다. 박승호는 자신이 준 명함의 직책을 마다하고 이름만을 부르는 하사장을 잠시 말없이 쳐다봤다. 그러고는 무슨 호기심이 또 발생했는지 종이와 봉투를 이리 뜯어보고 저리 살펴보고 했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염교수가 경쾌한 목소리로 나섰다.


"조대리, 이것도 여행사에서 기획한 거 아닌가? 한계 상황에서 동료들끼리 소통하고 협력하는 프로그램 같은 거 말야."


염교수의 말에 그제야 사람들은 아, 그렇구나, 하면서 다시 여유를 찾으며 조유나를 쳐다보았다.


"아녜요."


조유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는데도 아주 짧게 대답했다.


"그럼, 아니라고 하겠지. 어쨌든 조대리가 프로그램 진행을 해야 하니까. 근데 우린 지금 피곤해. 자꾸 이런 식으로 하면 난 아예 싱가폴 여행을 포기할 거야."

"염교수님 말씀이 옳습니다. 내가 뭐 호텔 옥상에서 헤엄을 못 쳐 한이 맺힌 것도 아니고."

"하사장님, 그래도 마리나 베이 샌즈는 요새 핫한 상품인데요."


박승호는 좀 전에 하사장에게서 받은 핀잔을 말끔히 잊은 듯 수선스럽게 대꾸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얼굴까지 빨개진 조유나가 잠시 말을 않고 끙끙대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침부터 배가 아팠어요…… 제가 뭐가 좋아서 이런 꼴을 보이고 싶겠어요?"


그녀는 곧 울듯한 얼굴이었다. 네 남자는 그제야 염교수가 던졌던 낙관을 모두 거두어드릴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