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귀정굴 탈출기 (7) 본문

글/단편소설

귀정굴 탈출기 (7)

조용한 3류 2015. 2. 4. 12:13

(7)


그들은 석순을 밟고 목말을 태웠을 때 동굴 천장에 닿을 만한 장소를 영역을 나누어서 찾고 있었다. 밀려드는 물에 통로가 막혔는데도 자신들이 계속 숨을 쉴 수 있다는 건 어딘가 외부와 통하는 곳이 있다는 걸 의미했다. 물론 동굴 벽에 뚫려 있는 구멍들이 그것일 수 있었지만 그 작은 곳으로는 아무도 드나들 수 없었다. 물에 잠기고 먹을 게 떨어질 때까지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다면 그들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 물이 처음처럼 빨리 불어난다면 몇 시간 후에 죽을 수도 있었다. 조유나 말대로 전설처럼 빠져나가는 길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물이 불어나는 속력이 눈에 띄게 줄어들자 남자들은 늑장을 부리기 시작했다. 조유나가 재촉을 해도 귀를 기울이는 이가 없었다.


"오늘 비가 온다는 말도 없었는데 물이 줄었다가 다시 불 수는 없잖아? 고비를 넘긴 게지. 이제 물이 빠질 거야."

"저도 염교수님 말씀에 동의합니다. 위험한 시도를 하느니 에너지 소비를 줄이면서 기다리는 게 상책일 겁니다."


할 수만 있다면 염교수의 비리를 모두 캐낼 것 같던 하사장이 다시 공손한 태도로 돌아가 있었다. 유들거림은 이제 부드러움이었다.


"설사 전설이 사실이었대도 이 광장인지 저 광장인지 모르잖아요?"


민중기는 길게 눕듯이 앉아 다시 뺨을 슬슬 어루만지고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것과 에너지 소비를 줄이며 버티는 것, 이 두 가지 사이에서 결정해야겠죠. 유입량이 늘지 않는다면 후자가 합리적이죠."


박승호 차례가 되자 완전히 일상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네 남자는 순식간에 사이좋게 의견을 통일하고 말았다. 염교수는 잠시 어긋난 행동을 했던 젊은이들을 용서하는 듯 그저 흐뭇한 미소만 지어댔다.


조유나는 빠져나갈 구멍을 찾자고 계속 설득하고 있었다. 아침에 오늘 비가 온다는 예보는 없었지만 얼마 전에 상류에 생긴 작은 수중보가 태풍을 대비해 미리 물을 내려 보낼 수도 있다고. 그렇게 되면 뭘 찾고 말고 할 시간조차 없다고. 그러나 사람들은 요지부동이었다.


"아직 저 밑에 있는 태풍 때문에 벌써 물을 내려 보내겠어? 조대리, 조대리도 편하게 쉬면서 버티라고. 기다리는 것도 능력이야."


염교수의 말처럼 남자들은 모두 여기저기 흩어져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전설 속의 처녀처럼 깜박 졸고 있던 그들을 깨운 이는 역시 조유나였다. 이번에는 흥분한 목소리로 천장의 어느 부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분명 밖에서 들어오는 빛이었다. 저녁이 되자 빛의 방향이 바뀌어 이제야 보인 모양이었다. 그녀는 들떴지만 남자들은 그게 보였다고 어쩔 거냐는 표정이었다. 특히 민중기는 그런 걸로 자는 사람을 깨웠냐며 반쯤 감긴 눈으로 답답하다는 듯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그녀의 계속된 부탁에 넘어 간 사람은 하사장이었다. 비록 입으로는 더 늙기 전에 미녀를 목말 태우는 것도 복이라고 했지만, 터벅터벅 움직이는 몸은 귀찮다는 아우성을 질러대는 것 같았다.


먼저 구부려 앉은 허사장 어깨 위로 올라간 그녀가 벽을 붙잡았다. 좀 전에 졸다가 깬 박승호가 동굴을 두리번거리다가 옆으로 와서 도왔다. 허사장이 그를 붙잡고 조금씩 일어나자 그녀 역시 벽을 더듬으며 천장으로 조금씩 옮겨 갔다. 전설에서 말한 대로였다. 원뿔의 중간쯤에 있는 구멍 바깥으로 밖이 보였다. 구멍 위의 바위가 마치 덮개처럼 내려와 있었고 구멍 앞을 관목들이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하사장, 고개를 쳐들고 있는 박승호, 그리고 길게 누워 있는 민중기와 뭔가를 따져 보고 있는 염교수를 한 명씩 쳐다보고는 힘들이지 않고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생각보다 밖이 위험하지 않다고, 일단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서 전화를 걸겠다며 사라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