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귀정굴 탈출기 (6) 본문
(6)
젊은 여성인 조유나가 먼저 볼일을 본 것은 남자들에겐 불행 중 다행이었다. 일단 방수 배낭이 화장실로 유용하게 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조심해서 작업을 해도 동굴 안의 공기는 조금씩 호흡할 때마다 힘들어졌다. 그러나 그 덕분에 남자 넷은 생리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그들은 바닥에 움푹 들어간 곳에다 소변을 보았다. 일을 치르고 난 조유나는 한쪽 구석에 가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조대리, 너무 그러지 마. 생리적 문제를 어떡하나?"
염교수의 말은 문장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그 표정만 본다면 비아냥대고 있다고, 성희롱의 욕구까지 내비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제 겨우 점심시간인데 진짜 아무도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나요?"
박승호의 거듭된 물음에 조유나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침에 타고 왔던 차는 돌아갔어요. 숙소로 갈 때는 제가 호텔에 연락을 한다고 했구요. 연락이 없다고 찾아 나설 사람은 특별히 없어요."
조유나가 볼일을 보는 동안에도 물은 꾸준히 불어나고 있었다. 동굴 바닥의 반 정도가 남아 있을 때는 실감을 못 하던 사람들도 점점 물과 함께 밀려들어오는 공포에 속속들이 젖어 가고 있었다.
"대체 누굽니까? 누구 때문에 우리가 이런 고생을 하는 겁니까?"
제 7광장에 들어온 이후 얼굴에서 손을 떼지 않던 민중기가 화난 목소리로 소리를 쳤다.
"단수가 아니고 복수 아닌가요? 이 종이를 보면 '그대들'이라고 했잖아요?"
습하고 탁한 공기에도 불구하고 박승호는 여전히 물에 잠기지 않은 동굴 내부를 부산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내참, 잘못한 사람이 혼자가 아니면 여럿이겠지. 뭐가 문제야? 그리고 그만 좀 움직이지 그래."
민중기의 말투가 갑자기 바뀌자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당사자인 박승호는 고개를 쳐들고는 어떻게 반응할까 고민하는 눈치였고, 염교수는 제일 연장자인 자기한테 허락도 안 받고 분위기가 변한 데 대해 불쾌해 하는,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당혹해 하는 눈치였다. 하사장만은 그런 민중기의 돌출 발언에 전혀 개의치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자, 사소한 걸로 흥분하지 말고. 여기서 잘잘못을 따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가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급선무지. 잘못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지 않겠어요? 음…… 염교수님, 뭐 생각나시는 거 없습니까?"
"생각? 뭔 생각?"
"뭔 생각은요? 누구한테 원수질 만한 기억이겠죠."
"하사장, 난 하늘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살아온 사람일세. 나는 자네들도 다 참석했던 그 학회의 회장이야, 회장이라구."
"학회 회장이 별 건가요? 정치 좋아하는 양반들끼리 돌아가며 하는 거 아닙니까?"
이번엔 민중기가 뺨을 슬슬 쓸어 올리며 대꾸하자 염교수는 어스름한 불빛 아래에서도 드러날 만큼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 이 사람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옆에 있던 하사장이 그의 팔을 붙들었다.
"가장 연세도 많으시고 하신 일도 많으니까, 얽힌 인연도 많지 않겠느냐, 뭐 이런 거지요. 예를 들어 돈만 받고는 교수로 채용해주지 않았다든가, 남의 논문을 슬쩍 표절했다든가 뭐 이런 거 없냐는 거지요."
염교수는 그래도 자신이 믿었던 하사장까지 오히려 웃으며 비아냥대자 거의 이성을 잃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하사장이…… 횡……령이나 배……임, 그런 짓 한 거 아냐? 그래. 그렇구나. 임금체불도 있고, 연구비 부정도 있구나."
"아이고, 왜 말씀까지 더듬으면서 그러십니까? 그런데 영세기업에 연구비가 있어야 횡령을 하지요. 그런 건 연구소라면 또 몰라도……."
하사장은 여전히 유들거리면서 대꾸를 했다.
"연구비 부정하면 학교나 기업이죠. 연구소는 얼마나 철저하게 중앙관리를 하는데요."
하사장은 박승호의 대꾸쯤은 아랑곳하지도 않았다.
"그럼 연구소에서는 별로 필요하지도 않은 기술이나 개발하고 그러나? 하하, 하하하."
털 빠진 수탉 같던 다리를 북북 긁으면서 하사장이 웃어댔다.
"다들 그만두세요. 서로 이러다가 죽을 거예요?"
여태까지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있던 조유나가 드디어 가이드란 자기 자리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물이 점점 밀려들고 있어요. 이렇게 죽을 게 아니라면 몸이 제일 가벼운 저를 탈출시켜주세요. 제가 사람들을 불러올게요."
"아니, 방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조대리를 탈출시킵니까?"
태연자약하게 사람들의 입씨름을 구경하고 있던 민중기는 다시 손을 바꾸어 뺨을 슬슬 어루만졌다. 조유나는 민중기를 똑바로 쳐다봤다.
"전설이에요. 전설처럼 빠져나가는 거예요.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른 길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