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데 뭐라도 된 것처럼
어느 연구소 이야기 (2) 본문
(2)
“어떤 점에 그렇게 회의를 느끼셨나요? 대덕연구단지라면 우리나라 이공계 우수 두뇌들이 모이는 곳 아닙니까? 일반인들은 첨단 기술을 연구하는, 불 꺼지지 않는 연구소를 떠올립니다.”
“불 꺼지지 않는 연구소요? 허허. ……연구 외에 일들이 많습니다. 3개월에 한 번 코딩(소프트웨어 프로그램 작성)할 수 있으면 정말 부지런한 팀장이란 말도 있지요. 한참 연구할 30대 중후반에 팀장이나 과책이 되면 과제 관리와 행정 일에 매달려서 연구는 뒤로 돌려지게 되지요. 회의는 또 좀 많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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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그날은 오후에 팀장 회의가, 저녁에는 송년회가 예정되어 있었다. 부장실에는 다른 팀장이나 과책들이 이미 모여 있었고 팀장 회의는 통상적인 얘기로 앞부분을 채워 나갔다. 새해가 되어도 정규직 충원은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 그래서 늘어가는 비정규직에 대해 연구소에서도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는 등, 첫 글자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우리 부에는 그런 사람 없겠지만, 기간을 부풀려서 출장비를 더 타내는 일이 아직도 있다고 합니다. 과책과 팀장들께서 꼭 체크해 주세요. 그리고 이번 달은 우리 부에서 기술 홍보할 차례였는데 어제 서울에 올라가서 기자회견을 잘 마쳤습니다. 모두 수고했습니다.”
T부장은 잠시 안경 너머로 시계를 흘깃하고는 다시 날카롭게 사람들을 죽 훑어보았다.
“그리고 연말연시에 지각 단속이 심할 겁니다. 모두 과제 수행하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근태관리나 사무실 환경정리 등 기초질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근태관리, 특히 지각에 대해서는 연구소에서 강박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심지어 비가 오는 날, 정원이 2천명을 넘는 연구소의 소장이 정문을 지키며 지각을 단속한 적도 있었다. 밤늦게까지 야근을 해도 별다른 보상은 없으면서 지각에 대해선 그렇게도 치졸하게 통제했기에, 연구원들 중에는 9시가 넘으면 아예 정문에서 유턴하여 점심시간에 슬며시 들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팀원들에게 지각할 것 같으면 미리 연락을 달라고 했고, 그러면 특별한 사유가 있다고 경비실로 전화를 하거나 아니면 기꺼이 사유서를 제출했었다. 이미 그런 일은 한두 해가 지나도, 원장이 여럿 바뀌어도 형태만 달라질 뿐 여전했다. 나는 그런 뻔한 얘기 대신 송박사한테서 들은 얘기가 언제쯤 나올지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고 있었다.
“각 과책들은 이런 걸 다 반영해서 과제원 평가를 했겠지요?”
갑자기 머리가 멍해졌다. 그랬구나…… 그래서 S박사가 그 젊은 연구원의 평가를 그렇게 했구나……. 우리 팀은 두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우리 과제원의 평가는 내가 직접 하지만 다른 과제는 과책인 S박사가 제출한 결과를 참고해서 평가를 하게 돼 있었다.
“지각은 이미 사유서를 제출해 처리가 끝난 것인데 그걸 평가에 또 반영하나요?”
“서박사가 그렇게 생각할 것 같아 과책들한테 미리 고려해서 평가하라고 했습니다.”
할 말이 없었다. 점점 변해가는 T부장, 부장 말이라면 알아서 먼저 꿈뻑하는 사람들. 정말 왜들 이러는 걸까…… 가슴이 답답했다.
어디나 그렇듯 연말은 평가의 계절이었다. 연구원한테는 과제가 가장 소중하며, 과제에 가장 애쓴 자가 평가를 가장 높게 받는 게 너무도 당연한데, 그건 또한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내가 입소할 무렵에는 논문, 특허, 프로그램의 영문 첫 자를 딴 3P로 모든 평가가 이루어졌었다. 좋은 결과를 얻으면 당연히 3P가 줄줄이 나오게 되지만 그건 이상적인 경우이고, 숱한 시도가 실패하고 결과가 그만그만한 경우에는 ‘건 수’를 위해 따로 신경을 써야 했다. 그래서 궂은일을 도맡아 한 과제원이 그 찬란한 3P가 없어 낮은 평가를 받는 부작용이 심심찮게 발생하곤 했다.
심지어 어떤 부서장은 연구원들의 3P에 대한 집착을 악용하기도 했다. 논문에 자기 이름이 공저자로 올려 있지 않으면 원고 심의를 통과시키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수군거렸는데, 그 덕분인지 그 양반은 일 년에 백 편도 넘는 논문을 냈다. 물론 그는 한 번도 자기 입으로 직접 요구한 적은 없었고 자신의 이름이 오를 때까지 계속, 그냥 계속, 서류를 반송하면 됐다.
그들은 그러지 않아도 살 수 있다, 는 걸 알지 못했다.